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는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린다. 원수의 자식을 사랑하고, 가문의 반대로 시련을 겪는 연인들의 이야기는 영원불멸의 베스트셀러다. 우리나라에도 국경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진다. 바로 고구려의 호동왕자와 낙랑국의 낙랑공주, 그리고 신비의 북 자명고를 둘러싼 고대설화다. 그 전설의 이야기가 발레로 재탄생했다.

◎ 국가대표 프로젝트 발레 ‘왕자 호동’

국립발레단의 발레 ‘왕자 호동’은 우리문화의 세계화와 선진공연예술에 대한 관심이 정점에 이르렀던 1988년 임성남 안무의 발레 ‘왕자 호동’을 모쨌� 한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한국적 발레 레퍼토리의 재탄생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기획된 작품이다. 대규모 프로젝트인 만큼 구성원의 면면이 심상치 않다. 총연출 국수호, 안무 문병남, 차진엽, 무대디자인 신선희, 작곡 조석연,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까지 국내 예술계에서 주목받는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여 최태지 예술감독과 힘을 합했다. 이들의 영향력 때문인지 무대 위에 공개된 발레 ‘왕자 호동’은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엿보인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관객들은 웅장한 무대 막을 바라보고 앉게 된다. 무대 막에는 고구려군과 낙랑군을 형상화한 봉황과 현무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 호동과 낙랑의 비극적 사랑을 담은 대서사시

발레 ‘왕자 호동’은 총 2막 20장 동안 극의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고구려군과 낙랑군의 전투로 시작된 작품은 그들의 웅장한 결투장면에서 볼거리를 제공한다. 붉은 갑옷을 입은 고구려의 호동왕자 부대는 낙랑국을 기습하고 필대장군의 부대와 전투를 벌인다. 호동과 필대의 대치하는 장면에서는 봉황과 현무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그래픽이 등장한다. 그들의 칼이 부딪힐 때마다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그래픽의 움직임이 단번에 시선을 끈다. 박진감 넘치는 음악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춤사위는 남성다운 기백이 넘치며 한 편의 무술영화를 감상하는 느낌을 준다.

낙랑군은 신비의 북 자명고를 지닌 탓에 고구려를 물리친다. 정복에 실패한 호동은 빈손으로 돌아오고 이에 대무신왕은 제천의식을 거행하여 하늘의 계시를 받고자한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신당에 등장한 신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려오는 흰색 의상을 입고 위엄 있는 춤을 선보인다. 대무신왕의 비이자, 호동의 의붓어머니인 원비는 아들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유혹적인 춤을 추어 호동을 혼란스럽게 한다. 대무신왕, 호동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파드되를 펼치는 원비는 손가락을 길게 펴고 쭉 뻗는 동작을 반복하며 강렬한 눈빛을 남긴다.

원비의 사랑을 거부하고 옥저로 유람을 떠난 호동은 사냥대회에 출전하여 신비로운 흰 사슴을 사냥한다. 이에 낙랑국의 최리왕은 호동을 눈여겨보고 그들을 초대한다. 최리왕의 딸이자 공주인 낙랑을 만난 호동은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다. 호동과 낙랑은 서로의 인연을 확인하고 둘은 혼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한 순간도 잠시뿐이다.

낙랑군을 격퇴해야만 하는 호동은 낙랑에게 자명고를 찢으라는 서신을 보낸다. 사신이 보낸 서신은 무대 위를 가득 메우도록 길게 늘어뜨린 하얀 색 천으로 표현되고 낙랑은 이 천에 휘감겨 고뇌하는 모습을 연기한다. 낙랑이 자명고를 찢은 후 고구려군이 전투에 승리하게 되지만 호동은 이미 숨을 거둔 그녀를 발견한다. 가녀린 그녀의 시신을 붙들고 오열하던 호동은 자신 또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어두운 무대 위에 쓰러진 낙랑과 검붉은 꽃잎을 맞으며 자결하는 호동의 모습이 애달프게 그려진다.

◎ 고구려, 낙랑국의 시대로 돌아가다

발레 ‘왕자 호동’은 다양한 춤을 통해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연무장에서 수련을 다지는 남성 군무는 고구려인의 기백이 느껴진다. 태권도를 응용한 동작들은 절도 있으면서 힘이 넘친다. 호동과 낙랑의 결혼식 장면에서는 각 부족들의 춤이 이어진다. 흡사 발레 ‘백조의 호수’ 2막 중 결혼식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흰 사슴은 어릿광대처럼 재간둥이 역할을 담당하고 물의 요정을 연상시키는 여성 군무가 하늘거리는 푸른 빛 의상을 입고 농염한 몸짓을 보여준다. 기다란 꿩 깃을 머리에 달은 두 마리 비조의 춤, 분홍빛 연꽃을 든 시녀들의 춤도 이어진다. 호동과 낙랑은 고전발레의 양식으로 구성된 그랑 파드되를 선보인다. 파드되와 각자의 솔로가 끝나면 낙랑의 휏떼(한쪽 발을 지탱한 상태로 다른 발을 감으면서 32회전하는 동작)와 호동의 점프, 턴이 하이라이트를 이룬다.

극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무대미술이다. 고구려 고분에 새겨져 있음직한 문양이 드리워진 무대, 고구려와 낙랑국의 궁전, 고구려의 삼족오가 그려진 휘장,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자명고의 모습 등에서 당시의 고구려와 낙랑을 재현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빠른 장면 전환을 위해 순식간에 떨어지는 주름진 커튼이나 무대막을 사용한 것도 효과적이었다. 의상 역시 한국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고구려군과 낙랑군의 의상은 적색과 황색으로 대비시켰다. 소매를 길게 늘어뜨려 고구려 벽화 속의 의상을 형상화하였고 나풀거리며 길게 드리워진 여인들의 치마는 토슈즈를 신은 발놀림에 시선을 머물게 했다.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신선했다. 네덜란드에서 맹활약하고 돌아온 김지영과 모스크바 국제콩클 수상 이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이동훈이 낙랑과 호동으로 열연했다.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의 설레임, 행복, 이별, 고통 등을 몸으로 표현하는 연기도 훌륭하다. 극의 마지막, 자명고를 찢고 숨을 거둔 낙랑을 부여잡고 호동이 울부짖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붉은 빛 꽃잎을 맞으며 자신 또한 숨을 거두는 호동의 이미지는 서정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발레 ‘왕자 호동’은 화려한 무대미술과 웅장한 음악, 한국적 호흡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춤을 선보였다. 한국적 정서를 지닌 발레 레퍼토리를 창조하기 위해 고대 설화, 한국적 이미지를 담아내는 소품과 의상 등 우리 고유의 것을 활용했다. 물론 발레라는 서양무용을 통해 그것을 담아내는 데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존재한다. 우리 춤의 특색을 담은 한국적 호흡은 발레의 테크닉과 상충되기 때문에 이를 소화해야하는 무용수들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이 한국무용과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 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결국 발레 고유의 테크닉과 양식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문화를 그 속에 내재시키는 것이 한국적 발레 레퍼토리의 과제인 것이다. 심도 깊은 고민 끝에 탄생한 발레 ‘왕자 호동’, 한국의 창작발레 레퍼토리를 향한 그 행보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홍애령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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