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21.4.10 토 16:08
상단여백
HOME 연극
[취재기] 차갑게 식어버린 연극의 생(生), 연극 ‘도살장의 시간’

 

지난 10월 27일 오후 2시,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연극 ‘도살장의 시간’의 프레스 리허설 공연이 진행됐다. 연극 ‘도살장의 시간’은 원작의 제의성과 추상성을 무대와 대사, 신체의 몸짓으로 구체화했다. 세 개의 층으로 구분된 무대는 각각 지하 공간과 연극사 자료실, 창고로 구성됐다. 도살장으로 표현되는 지하공간의 경우 자유소극장 무대의 리프트를 끝까지 내려 검은 우물의 깊이를 표현했다.

연극은 박지일 배우의 나레이션을 시작으로 암전된 채 시작된다. 연극의 존재증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주인공 천편의 말을 뒤로 2층의 무대에 천편과 그의 내면이 등장한다. 하나인 듯 합치를 이루면서도 나눠지는 그들은 천편이 가진 고뇌를 몸짓으로 그려낸다. 한태숙 연출가는 “관객들에게 유한적인 연극의 상실감을 암전 속에서 읊는 나레이션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며 “적극적으로 리얼한 상황을 도입했다기보다는 희곡화과정 통해 구체성이 부가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전했다.

연극 자료실이 개관하는 날 천편은 자료실로 숨어들어 여자와 처음 만나게 된다. 자료실의 사서인 여자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얼굴만큼이나 하얀 옷차림을 한 채로 자료 정리에 분주하다. 그런 그녀에게 천편은 묘한 호기심을 갖게 되고, 그녀를 보며 제단에 바쳐지는 한 마리의 순결한 염소를 떠올리게 된다. 저변에서 계속해서 들려오는 물방울 소리는 도살장에서 죽어가는 짐승들의 핏방울을 연상케 해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과 불안감을 조성한다.

 

짐승들의 부패한 냄새로 가득 찬 도살장. 도살장의 불빛을 따라 기억이라는 한 소녀가 찾아든다. 천편의 괴기스러움에 두려움을 느끼는 도축검사관이나 가죽장과는 달리 기억은 천편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지 않는다. 기억은 천편의 곁을 맴돌며 그 자신의 순수함으로 천편의 옛 기억을 다시금 불러낸다.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한 남자 아이. 그 아이는 터져버릴 듯한 심장을 부여잡은 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연극 무대에 오른다. 무대에 한껏 매료된 아이는 순간의 과오로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낸다. 깨진 유리병의 파편은 동료의 목에 박혀 선명한 붉은 빛의 피를 품어낸다. 차마 잊을 수 없었던 과거를 회상하며 천편은 내면과의 2인무로 그 고통을 드러낸다. 그들의 몸짓은 벗어날 수 없는 기억의 편린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천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무대를 위한 제(祭)를 지낼 것을 결심한다. 자료실을 찾은 천편은 기면증으로 잠에 빠진 여자를 들춰 없고 제의의 의식을 진행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과거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짐승들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루하루를 취한 채로 보내야 했던 그는 이제 제물이 될 여자의 입에도 소주를 흘려 넣는다.

개관을 축하하는 경쾌한 행진곡 위로 이내 깨어난 여자의 비명소리가 겹쳐진다. 지나칠 정도로 밝은 행진곡은 여자의 비극적인 상황을 효과적으로 대비시킨다. 작업대에 결박된 그녀는 겁에 질린 순결한 염소를 떠올리게 한다. 도끼로 여자를 내리치려 하는 천편. 그녀를 제물로 바치면 연극은 과연 죽음이라는 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안다. 이 여자를 제물로 바쳐도, 자신의 심장을 꺼내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연극 무대에 설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는 암흑 같은 정적에 휩싸였다. 죽음의 무게가 느껴진 탓일까. 싸늘한 정적 위로 연극이 너무 좋아 연극의 종이 되고 싶었다던 한연출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새로운 표현이 없거나 자기만의 철학이 없다면 언젠가 연극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던 그녀의 말 위로 연극의 생(生)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박소연 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 강지영 기자 newstage@hanmail.net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뉴스테이지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스테이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