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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뮤지컬 ‘닥터지바고’, 시대의 격랑을 타고 흐르는 애틋한 사랑의 시박은태-전미도, 섬세한 내면 연기로 표현한 숙명적 사랑

결혼식이 열리는 한 부르주아 저택의 화려한 무도회장. 의사이자 촉망받는 시인이었던 유리 지바고는 자신의 결혼식장에 총을 들고 난입한 한 여인에게 강렬한 운명을 느낀다. 자신을 겁탈한 고위법관 코마로프스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과감히 총구를 겨눈 여인 라라.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다른 계층 출신인 두 남녀는 그렇게 숙명적인 만남을 거듭한다. 내일이 불투명한 암울한 시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이념과 투쟁의 시대에 둘은 표류하다 이정표처럼 서로에게 강하게 사로잡힌다. 뮤지컬 ‘닥터지바고’를 단순히 로맨틱한 사랑의 서사로만 볼 수 없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격랑의 시대에서 끝까지 자신의 신념과 주체적 의지를 지키며 살고자 했던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정신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념과 고뇌, 러시아 혁명의 흐름 속에 잘 녹여내

뮤지컬 ‘닥터지바고’는 20세기 초 황제의 막강한 권력이 농민을 착취하던 ‘짜르의 시대’부터 1차 세계대전을 거쳐 볼셰비키당이 이끈 10월혁명,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에 이르는 러시아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한다. 작품은 이러한 시대적인 격변을 각기 다른 신념과 배경을 가진 다양한 계층 출신의 인물들의 갈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인간애와 평화정신을 가진 부르주아 출신 의사 유리 지바고와 전형적인 부르주아 여성인 그의 아내 타냐, 불우한 배경 속에 부르주아에게 성적 착취를 당한 라라와 그로 인해 강한 투쟁의지를 불태우게 되는 혁명가 파샤까지 인물들은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각자의 이상을 품는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과 이어진 내전은 러시아에 봉합할 수 없는 상처와 갈등만을 심화시키고 네 인물은 역사의 격랑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린다.

지바고와 라라의 만남과 헤어짐이 서사의 한 축이라면, 시시각각 변하는 러시아의 정세에 희생되거나 고통을 겪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또 다른 서사 한 축을 담당한다. 실제 그 시대를 겪지 않은 관객들은 인물들의 아픔과 슬픔, 그 속에서 피어나는 기쁨과 희망에 공감하며 전쟁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절절히 체감할 수 있다. 1막에서는 라라와 파샤의 결혼식날 친구들과 함께 열린 피로연 자리에서 펼쳐지는 넘버 ‘It’s a godsend’가 인상적이다. 황제정의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 자유와 행복을 꿈꾸는 당시 민중들의 소망을 경쾌한 멜로디와 변주, 재치 있는 안무와 앙상블과의 호흡으로 풀어냈다. 이후 첫날밤에 라라가 과거를 털어놓는 ‘When the music played’는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겼다”는 가사처럼 부르주아에게 성적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소녀의 가슴 아픈 고백이 당시 민중의 고통을 대변한다.

서정적 멜로디, 시적인 가사 위를 흐르는 파노라마 영상

무대는 최소한의 오브제만을 활용해 간소화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무대 뒷면을 반원 형태로 둘러싼 파노라마형 디스플레이 영상이다. 무채색의 도시, 화염이 앞을 가리는 전쟁터, 햇살이 비치는 숲속 도서관과 눈이 흩날리는 유리아틴의 모습까지 서정적인 멜로디에 얹혀 흐르듯 녹아든다. 화려한 볼거리가 없고 무대 전환이 단순한 것은 아쉽지만 영상이 각 장면의 분위기 전달을 돕는다. 특히 무채색이 대부분인 전쟁터 영상 속에서 오렌지빛과 황금빛이 섞여드는 숲을 지나 유리아틴의 도서관으로 바뀌는 부분이나 이별을 앞두고 눈발이 흩날리는 유리아틴의 배경은 역경 속에 사랑을 이어가는 둘의 만남을 더욱 낭만적으로 느끼게 한다.

‘닥터지바고’의 넘버는 서사의 흐름을 바꾸고 인물의 정서를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귓가에 여운을 남기는 인상적인 넘버도 꽤 있다. 1막의 오프닝인 ‘Two worlds’는 두 주인공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어떤 배경과 사연 속에서 성장했는지와 러시아의 혁명적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원작의 방대한 서사 속에 담긴 인물간의 복잡한 관계를 음악과 무대분할로 알기 쉽게 풀어냈다. 1막의 후반, 관객에게 압도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는 넘버는 ‘Now’다. 사랑하는 이가 있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은 병사 얀코의 편지를 지바고가 나지막히 읊조리며 시작되는 도입부가 애틋하다.

“어두운 텐트 속 몸을 누이고 너에게 편지를 써. (…) 더는 숨길 수 없어서 감출 수 없어서 말하려 해. 노래처럼 넌 내 안에 흘러. (…) 지금이야 내일이면 늦어. 기다릴 수 없어 더 이상은. 내일은 오지 않을지 몰라. 말하고 싶어 말해도 될까 사랑해 더는 숨길 수 없어. (…) 넌 피어날 꽃처럼 불꽃처럼 날 타오르게 해. 내 모든 고통 사라지게 해.”    - 1막 ‘Now’ 중에서 -

남의 편지를 읊조리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가슴 속 목소리가 되고 노래가 된다. 감춰왔던 둘의 서로에 대한 감정이 터지듯 쏟아지는 이 장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나 지바고는 모스크바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속에서 헤어짐을 앞에 둔 사랑은 애절하게 타오른다. 타인의 편지로 대신 고백하게 되는 장면의 연출과 그간 숨겨왔던 마음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두 배우의 표정 연기가 지켜보는 관객마저 가슴 저리게 하는 명장면이다.

‘닥터 지바고’, 억압에 굴복하지 않는 그 아름다운 정신

원작소설은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이야기로 유리 지바고는 작가 자신의 삶을 투영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작가는 실제로 자신이 겪었던 러시아 혁명과 내전 전후의 시대 상황, 아내와 연인 사이를 오가며 나눈 사랑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완성했다. 전후 사상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자유와 예술을 노래했던 작가는 연인과 함께 스탈린 정부의 탄압에 시달려야 했고, 자국에서 ‘닥터지바고’의 출판이 금지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을 앞두고 정부로부터 추방협박을 받는 상황에서도 그는 ‘조국을 떠나는 것은 내게 죽음’이라며 의지를 꺾지 않았다.

주인공 유리 지바고 역시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혁명기에 많은 수난을 겪고, 파르티잔(적색군)의 인질로 잡혀가기도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죽어가는 이들에 함께 아파하며 평화와 자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가 가족과 헤어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상실해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를 사랑했던 아내와 라라는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시를 쓰는 것을 멈추지 않도록 독려한다. 결국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곁을 지키던 라라마저 떠나보내면서도 시를 통해, 굴복하지 않은 자신의 아름다운 정신을 끝까지 남기려 한다.

박은태-전미도, 감정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섬세한 내면 연기

주인공 지바고를 맡은 박은태의 섬세한 연기와 전달력 좋은 목소리는 큰 인상을 남겼다. 라라역 전미도의 강인하면서도 감성적인 연기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애틋한 장면을 곳곳에서 연출해냈다. 두 배우는 큰 시대적 격랑에서 감정을 직접적으로 호소하거나 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내면에 흐르는 갈등과 의지, 신념을 섬세하게 살리는 데 주력했다. 대체로 서정적이고 클래식한 넘버에 두 배우의 순수하면서도 심지 깊은 목소리가 잘 어울려 은은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라라를 겁탈하는 악역 코마로프스키 역의 서영주 또한 특유의 강한 카리스마와 객석을 압도하는 목소리로 두 남녀 주인공의 서사를 낭만적으로 만드는 데 한몫을 했다.

이번 2018년 ‘닥터지바고’에는 새롭게 추가된 곡이 있어 눈에 띈다. 1막의 후반 ‘Home where the lilacs grow(라일락 꽃이 피는 그곳)’은 전쟁터에서 지바고와 함께 다친 병사를 돌보던 종군간호사들이 전쟁이 끝날 것을 예감하며 부르는 노래다. 작품에서 중요한 서사가 아님에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즐겁게 춤을 추는 간호사들의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언제 전쟁이 끝날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망의 현장에서도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고향에의 꿈, 평화에 대한 의지 덕분이었다. 아무리 긴 전쟁도 언젠가는 끝나며, 상처는 아물고 남은 사람은 살아간다. 억압의 시대가 지나고 소설 ‘닥터지바고’가 오늘날 명성을 되찾았듯 우리 역사는 결국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 그것을 유리 지바고의 파란만장한 삶이 보여주는 듯하다.

사진제공_오디컴퍼니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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