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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절망 위로 흐르는 슬픈 농담, 연극 ‘킬미나우’7월 16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욕조에 떠다니는 노란 고무오리가 증오스러운 소년이 있다. 미운오리새끼는 나중에 아름다운 백조가 되겠지만 자신한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성(性)에 막 눈을 뜬 지체장애 소년 ‘조이’는 자신의 평범하지 않은 몸에도 평범하게 찾아와버린 자신의 욕망에 슬퍼진다. 어떤 여자가 괴물 같은 나를 안아주겠냐고 소리치는 ‘조이’와 그의 몸을 닦아주는 아빠 ‘제이크’는 절망과 불안 속에서 농담으로 서로를 위무한다. 비명을 지르는 것만이 고통의 표현은 아니다. 연극 ‘킬미나우’는 고통 위를 예사롭게 지나가는 농담들로써 관객의 가슴을 묵직하게 누른다. 사랑받고 싶고, 자유롭고 싶고, 꿈꾸고 싶은 그들의 욕망이 지극히도 평범하고 흔한 것이어서 관객은 되려 미안해진다. 괜찮은 척 하는 그들과 괜찮지 않은 현실 사이에서 관객은 반성한다. 그들의 희생과 고독을 왜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며 때때로 동정의 시선을 주는 것으로 만족했을까 하고.

지극히 평범한 17세, 장애를 바라보는 투명한 시선

연극 ‘킬미나우’는 그들이 아픔을 표현하지 않는 만큼 대신 아파주고 싶어지는 극이다. 장애를 근거로 동정을 구걸하지 않으며, 극은 중반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담담하고 일상적인 연기들로 장애를 가진 삶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이가 성장하며 겪는 성(性)과 자립의 문제는 일반인들은 생각해보지 못했던, 그러나 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자 당연한 욕망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몇 안 되는 해결책은 매우 기계적이고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이다. 아빠는 “그렇게 조이가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늘어났다”고 한탄한다. 결국 아들을 위해 아빠는 성(性)적 해소까지 대신 해주기로 결심한다. 아빠 여기 없어, 이 손은 여자 손이야. 아들의 신음과 겹쳐지는 아빠의 울먹임. 장애 청소년과 그 가족이라면 누구나 겪을 현실이 귀에 생생하게 와닿는 순간, 객석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진다.

휠체어를 타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뒤틀린 입으로 말을 할 뿐, ‘조이’는 지극히 평범한 17세의 모습을 보여준다. 게임을 좋아하고, 어른에 대한 반항심에 금방 예민해지며, 때로는 거친 욕설도 서슴없이 한다. 그런 ‘조이’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장애에 대한 그간의 편견을 실감하게 된다. 몸이 장애일 뿐 마음이 장애인 것은 아니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오히려 착하지만은 않은 말썽쟁이 ‘조이’를 통해 깨닫는다. 또한 아빠의 연인인 ‘로빈’을 통해 일반인과 장애인 간의 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비틀린 입에서 나오는 ‘조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제이크’의 책을 읽어주는 그녀의 행동은 꾸밈이 없는 만큼 잔잔한 감동을 남긴다.

우리는 우리의 생을 마칠 권리가 있는가

연극 ‘킬미나우’가 던지는 두 번째 화두는 안락사(euthanasia)다. ‘행복한 죽음’ 또는 ‘존엄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의미하는 ‘안락사’는 현재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불치의 환자가 스스로 또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스스로 생을 마칠 수 있어야 한다는 인권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환자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빼앗는 행위라는 점에서 여전히 뜨거운 논쟁의 가운데에 있다. ‘조이’의 아빠 ‘제이크’가 극의 중반에서 불치의 병에 걸렸음을 알게 되면서 그는 돌보는 처지에서 돌봐지는 처지가 되어간다. 작가라는 자신의 꿈마저 굳어가는 육체 속에 갇혀 박제되어가고 그는 이제 자신에게 남은 권리가 ‘인간다운 죽음’뿐임을 깨닫는다.

자립의 문제로 아빠와 날카롭게 갈등했던 ‘조이’는 극의 후반 불치의 병으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아빠의 든든한 보호자이자 이해자로 변한다. 평생 남의 돌봄을 받으면서 일상생활을 해야 했던 ‘조이’로서는 고통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아빠가 느낄 절망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한다. 우리가 누구나 태어나는 것을 결정할 수 없다면, 태어난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마칠 것인가는 온전히 우리의 결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태어난 이후의 삶에’ 대해 고군분투해 온 ‘조이’와 적어도 인간답게 ‘남은 삶’을 마치고 싶은 ‘제이크’는 서로의 결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욕조의 상징성, 가장 내밀한 공간 속 삶과 죽음의 이야기

극은 욕조에서 시작해 욕조에서 끝이 난다. 욕조는 몸이 불편한 ‘조이’를 돌봐야 하는 아빠 ‘제이크’의 희생적 삶의 공간이었다가 끝내는 마지막 자신의 결정으로 스스로 몸을 눕히는 죽음의 공간이 된다. 그 곳에서 부자는 좌절의 속내를 토로하고,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배출하기도 하고, 버둥거리는 무력감을 경험하는 동시에 양수 속의 태아처럼 평안을 얻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그 내밀한 공간이야말로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없었던 그들에게 작게나마 주어진 편안하고도 안전한 세계였다.

극의 마지막,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진 아빠는 조이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조이, 아빠 좀 씻겨줄래?” 몸이 불편한 ‘조이’가 자신을 씻겨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것은 둘의 공감과 이해에서 만들어진 슬픈 사인이다. ‘조이’는 기꺼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빠가 누운 욕조에 다가간다. 욕조에서 둘은 마지막 슬픈 연극을 시작한다. 마비된 몸을 눕힌 아빠에게 ‘조이’는 아빠가 쓴 책을 읽어 준다. “태어나는 모든 아이는 완벽한 존재다. 태어나는 그 순간, 그 존재 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든다” 약, 술, 욕조. 완벽한 아이 ‘조이’는 아빠가 인간답게 죽기 위한 ‘완벽한 죽음’을 연출한다. 노란 고무 오리만이 그들을 지켜본다.

‘제이크’가 죽기 전 ‘조이’가 장애가 없는 모습으로 아빠와 일상을 보내는 장면이 환상처럼 재현되는 순간이 있다. 장난치며 흩날리는 웃음과 깃털들이 마치 꿈같이 아름답다. 환상이 끝나고 현실은 더욱 짙은 음영으로 대비를 이룬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그들의 슬픈 결심을 지켜보는 관객의 가슴에는 질문이 남는다. 과연 그들의 행복을 앗아간 것은 정말로 장애였을까.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조이’의 바람과 꿈을 이루고 싶은 ‘제이크’의 바람은 그들에게 과한 욕심이었을까.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족 간의 이벤트가 유독 많은 5월에 더욱 짙은 절망의 냄새를 맡아야 하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을 문득 떠올린다. 대다수 가정의 밝고 활기찬 일상에 가려진 수많은 그늘에도 어떤 가족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연극 ‘킬미나우’는 장애인의 삶을 미화하거나 반대로 과장하여 동정을 구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삶에 깊이 배어 있는 절망의 냄새를 함께 맡게 한다. 인간이 누구나 존엄성을 가진다면 신체적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엄한 권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당연한 깨달음이 값지게 다가온다.

장애가 더 이상 절망이 아니라 평범한 아름다움이기를. 육체적 장애가 정신적 성장과 욕망의 발현에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기를. 극의 처음부터 지체장애의 연기와 반항적인 청소년의 연기를 한 몸으로 열연한 신성민 배우에게 박수를 보내며, 극의 진정성이 무대 밖에 놓인 실제 삶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 있는 균열로 뿌리내리기를 응원해 본다.

사진 출처_(주)연극열전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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