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10.18 금 17:53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리뷰
[리뷰] 가장 따뜻한 나만의 담벼락에게, 뮤지컬 ‘키다리아저씨’클래식한 2인극이 전하는 진정한 소통의 가치

또박또박 마음을 눌러 쓴 편지를 곱게 접어 넣고, 그 봉투를 여밀 때의 두근거림. 우리가 오래전 잊고 있었던 그 설레는 감정이 무대 위 한 소녀의 편지를 통해 되살아난다. 귓가에서 조잘대는 듯한 소녀의 사랑스러운 필체가 아날로그적인 언어만이 줄 수 있는 행복감을 전하고, 객석은 언젠가의 첫사랑을 회상하듯 향수에 폭 빠진다.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그렇게 그 어떤 방법보다 순수하고 클래식한 정공법으로 관객의 가슴을 두드린다.

천진함으로 무장해제, 순수소녀의 귀여운 수다

“키다리 아저씨께. 진짜 진짜 진짜 안 좋은 소식이에요. 오늘처럼 아름다운 겨울 오후, 전나무 가지마다 투명한 고드름이 열려있고, 온 세상이 흰 눈으로 쌓여 있는데. 제 어깨에는 슬픔만이 쌓여 있어요.”

- 제루샤의 편지 中-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주인공 제루샤 에봇이 ‘키다리 아저씨’께 전하는 솔직하고 발랄한 편지의 내용 그 자체다. 한 문장 한 문장에 위트가 넘치고 일상의 감정선이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대사에 경쾌하게 녹아 있어 관객을 절로 미소 짓게 한다. 원작소설인 진 웹스터의 서간체 소설 ‘키다리 아저씨’의 화법을 그대로 옮겨서 인물의 매력을 한껏 극대화한 전달 방식이 2인만이 등장하는 극을 허전함 없이 단단하게 채운다. 상상력이 풍부한 제루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녀의 일상이 눈에 보이듯 그려진다. 무대의 전환이나 화려한 연출은 필요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제루샤의 표정과 목소리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가장 생생하게 전달한다.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거리낌 없이 재잘대고, 실패와 좌절에도 다시 꿋꿋이 일어서는 소녀. 이 사랑스러운 소녀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뿐 아니라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마치 이솝우화 ‘북풍과 태양’의 태양처럼 그저 순수하고 따뜻한 성품으로 냉정하게 감춰졌던 ‘키다리 아저씨’의 ‘후원자’라는 가면을 벗게 하고,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의 벽마저 무장해제시킨다.

 예민하고 감성적인 소녀, '제루샤'의 성장을 지켜보는 감동

개성 강한 말괄량이 소녀가 좌충우돌 다양한 경험을 하고, 감정의 변화를 겪으며 어엿한 숙녀로 성장하는 과정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인 일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전 세계의 독자를 사로잡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 앤’이 떠오르기도 한다. 엉뚱한 공상으로 하루 종일 재잘대던 앤이 어엿한 숙녀가 됐을 때, 그녀를 딸처럼 키워 온 마릴라는 “초록지붕집의 수다쟁이 앤 셜리가 이렇게 조용하다니,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드는구나”하고 눈물을 흘린다.

수학과 라틴어에서 낙제를 해 우울해하고, 락윌로우 농장에서 처음 먹는 비스킷, 쿠키에 넋을 팔던 어린 소녀가 ‘이젠 어리숙한 어린소녀가 아니’라고 말하며, 2학년이 되자 후배 신입생들의 모습을 ‘귀엽다’고 말한다. 친구의 집에서 자신을 위한 첫 무도회를 경험하고, 뉴욕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보면서 그녀는 더욱 성장하고, 4학년에는 학보사 편집장을 거쳐 꾸준히 자신의 소설을 쓰며 미래의 꿈을 키운다. 그리고 대학을 최우수로 졸업한 그녀는 제르비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프러포즈를 받는 어엿한 숙녀가 된다. 그 재잘대던 어린 소녀가 사랑을 하는 여인이 되다니. 관객은 마릴라처럼 쓸쓸하면서도 흐뭇한 감동에 눈가가 촉촉해진다.

필모 자체가 피땀의 길, 이지숙 배우의 ‘제루샤’

이지숙 배우가 대단한 노력파 배우라는 것은 경희궁 숭정전에서 초연을 했던 ‘왕세자 실종사건’때부터 증명된 사실이다. 초연의 뜨거운 호응으로 다음해 재공연 무대가 올랐을 때, 그녀는 인터뷰에서 그야말로 ‘죽도록 달리는’ 연습 과정을 웃으며 이야기했었다. 한국 초연인 이번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또한 녹록지 않았을 연습과정을 쉽게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2인극으로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해야 하는 배역의 비중에다, 편지글을 모두 대사화해 대사량이 많고 리듬이 빠르다. 무대의 전환이 없어 스스로 소도구를 끊임없이 이동시켜야 하는 복잡한 동선까지 계산해야 한다. 

특히, 여주인공 제르샤는 쉴 틈 없는 대사와 동선, 다양한 표정과 톤의 변화, 상대 배우와 대사와 넘버가 무수히 교차되는 합까지 난이도 높은 연기가 요구된다. 그 어려움을 뚫고 이지숙 배우는 무대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하는 발랄한 제르샤 그 자체였다. 고아원 시절부터 대학을 입학에 졸업하기까지의 매 순간을, 소녀다운 해맑음과 천진함으로 연기했고, 많은 양의 대사를 경쾌한 특유의 리듬감을 얹으며 소화해 내 관객에게 끊임없이 웃음을 주었다. 단순하지만 세밀한 연출은 배우의 기량에 온전히 기대고 있다. 그래서 여배우를 향해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필모 자체가 피땀의 길인 이지수 배우의 열정이 생생히 살아 있다.

진정한 ‘육성’의 소통, 우리는 누구나 ‘키다리 아저씨’가 필요하다

“아저씨는 정말 든든한 담벼락 같아요.”
“나 누군가의 가족이 된 듯한 든든한 기분. 나 누군가의 보살핌 속에서 사는 기분.”
- 제루샤의 편지 中 -

우리의 미래는 늘 불확실하고, 눈앞에서 허무하게 지나가는 일상은 불가역한 과거가 되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더욱 소모적으로 만든다. 언제든 접속할 수 있는 sns 속에는 실시간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수많은 목소리가 있지만, 우리가 귀 기울이고 싶은 목소리는 불특정 다수가 아닌 ‘나’라는 개인에게 오롯이 향하는 따뜻한 육성이다.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제르샤와 제르비스가 수년에 걸쳐 나누는 오직 한 사람을 향한 마음과 목소리를 들려주며,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었던 진정한 소통의 가치에 대해 깨닫게 한다.

평일 공연장의 객석이 만석으로 연일 매진 행렬을 이루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아닐 것이다. 불특정 다수와의 일방적 소통과 형식적인 관계들에 지친 관객들은 ‘키다리 아저씨’와 진심을 나누며 영혼의 이해자가 되어 사랑에 빠지는 제르샤에게서 큰 위안을 얻는다.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는 단 한 명이라도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행복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귀여운 펜팔 커플을 바라보는 객석의 우리들 또한 따뜻한 순풍처럼 우리의 등을 밀어주며 미래를 응원해 줄, 나만의 ‘키다리 아저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진출처_달 컴퍼니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세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