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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인간의 본질은 찌질함, 국립극단 연극 ‘갈매기’6월 29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안톤 체호프’와 ‘펠릭스 알렉사’의 찌질이 집합소  

‘체호프’와 ‘펠릭스’의 찌질이 시너지는 대단했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망연자실한 ‘안톤 체호프’의 인물들과 그 인물 속 깊이 내재한 찌질함만 쏙쏙 골라놓은 ‘펠릭스 알렉사’의 연출은 연극 ‘갈매기’의 무대를 찌질이 집합소로 만들었다.

그 찌질함은 끊임없이 웃음을 생성했다. 상쾌하고 호탕한 웃음이 아닌, 연민과 동정,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이 섞인 웃음이다. 회식에서 과음을 하고 주사를 부리는 직장 동료를 보며 나오는 웃음이랄까.

등장인물들은 쉴틈없이 찌질하다. ‘아르까지나’는 자기보다 어리고 예쁜 여자 앞에서 자신의 연기적 우월성을 굳이 드러내고, 동시에 아량을 베푸는 척 한다. ‘뜨레쁠례프’는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징징거리는 유아적인 찌질함과 ‘그 뻔한 통속소설도 못 쓰면서’ 기성세대의 예술을 낡고 진부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춘기의 치기를 보인다. ‘니나’는 임자 있는 ‘뜨리고린’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꼬드기고, ‘뜨리고린’은 어리고 예쁜 여자와 사귀어본 적이 없다며 잘 만나던 ‘아르까지나’를 떠난다. 심지어 다시 돌아오기까지 한다. 헛웃음이 난다.

찌질하고, 평범하고, 고결한 인간  

헛웃음을 흘리며 내내 들었던 생각은 ‘어쩜 저렇게 우리와 똑같을까’였다. 내 친구의 친구는 19살 차이의 남자를 만나고, 다른 친구의 남자친구는 바람을 피우다 걸렸다. 마흔을 바라보는 내 지인은 아직도 자신이 소녀같은 줄 알고, 전에 잠시 만났던 남자애는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러시아의 작가가 내 주변의 찌질함을 이렇게 똑같이 그려내다니. 이 찌질함이 바로 ‘체호프’의 보편성, 인간의 본질인가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면 깊숙이 찌질함을 묻어놓고 산다. 그러다 갑자기 외로워지거나, 욕망이 실현되지 못하거나, 내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을 때 그 찌질함이 튀어나온다. ‘펠릭스 알렉사’는 잔인하게도 그 튀어나온 상황만 모아 무대화했다. 더 강조하기도 했다. 2막 시작에서 ‘햄릿’ 4막 7장의 ‘오필리아’를 연기하는 ‘아르까지나’는, 지금껏 쌓아온 그녀의 매력과 커리어만큼이나 안쓰러웠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안쓰러울 만큼 찌질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속을 끓였다.

찌질한 ‘아르까지나’는 찌질한 ‘뜨리고린’을 두고 말한다. “그분은 고결하신 분이야!” 그녀는 ‘고결한 인간’ 안에 ‘뜨리고린’을 가두려한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뜨레쁠례프’는 ‘아르까지나’에게 ‘다정한 어머니’를, ‘니나’에게는 ‘세상에 너뿐인 사랑’을 들이민다. ‘니나’는 ‘아르까지나’에게 ‘유명 여배우’, ‘뜨리고린’에게 ‘성공한 소설가’의 굴레를 씌운다. ‘뜨리고린’은 자기 자신에게 ‘소심하고 겸손한 글쟁이’의 이미지를 유지하려 한다. 자신을, 또 타인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고, 원하는 모습대로 생각해버리는 모습조차 ‘인간적’이다. 아무런 행동 없이 말만 하는 이 인물들이 바로 현대에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또 한 번 ‘체호프’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찌질함을 고급지게 소화하는 배우들  

찌질함이 가장 두드러질 때는 본인은 그게 찌질하다는 것을 모를 때다. 국립극단 연극 ‘갈매기’의 배우들은 너무나 능청스럽게 그 찌질함을 소화했다. 그래서 그들의 연기는 고급스러웠으며, 동시에 찌질했다.

‘이혜영’의 ‘아르까지나’는 ‘이혜영의 아르까지나’라고밖에 설명하지 못하겠다. ‘이혜영’이 ‘아르까지나’가 된 것도, ‘아르까지나’가 ‘이혜영’을 삼킨 것도 아닌, 그냥 ‘이혜영만의 아르까지나’였다. 우아하고 아름답고 기품있는 여배우의 소녀 같은 찌질함을, ‘이혜영’은 ‘이혜영’ 세 글자로 해냈다.

‘이명행’이 분한 ‘뜨리고린’은 젠틀하지만 이기적이다. 그래서 잔인하다. 자신의 호기심을 위해서라면 두 여자가 다치더라도 무감각하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기억나지 않습니다’로 일관한다. 마지막에서 카드로 상을 내리치며 나는 딱딱 소리와 맞물려 반복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는 이명행의 목소리 덕분에 깊은 울림을 얻었다.

신예배우 ‘김기수’의 ‘뜨레쁠례프’도 훌륭하게 찌질했다. 그의 소년미와 병약한 제스쳐는 소년에서 남자가 되지 못한 ‘뜨레쁠례프’의 치기 어린 사춘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니나’ 역의 ‘강주희’ 역시 어리고 순수한, 때묻지 않은 소녀가, 자신의 순수한 명예욕에 삼켜지는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소린’ 역의 ‘오영수’, ‘도른’ 역의 ‘이승철’, ‘샤므라예프’ 역의 ‘이창직’, ‘뽈리나’ 역의 ‘이정미’, ‘메드베젠꼬’ 역의 ‘박완규’, ‘마샤’ 역의 ‘황은후’, ‘하녀’ 역의 ‘박지아’, ‘야꼬프’ 역의 ‘장찬호’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위선과 찌질함을 전해주었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그 모습도 우리와 닮았다. 웃음이 난다.

층위의 무대연출  

번역을 맡은 ‘오종우’ 성균관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체호프’는 ‘갈매기’를 집필하던 10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곧 마무리할 희곡이 무척 마음에 들어. 비록 무대의 여러 조건들에는 맞지 않지만 말이지. 코미디인데, 말은 많고 행동은 적으며, 무거운 사랑 타령들에다가, 호수 풍경까지”라고. 이어 11월 말 ‘갈매기’를 완성하고서는 “연극예술의 원칙에 맞는 점은 하나도 없는 작품이지. 포르테로 시작해서 피아니시모로 끝나거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초연은 장렬히 실패했다.

지금은 ‘햄릿’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체호프’의 ‘갈매기’. 극중극이 나오고, 연극을 다루며, ‘햄릿’의 대사도 몇 구절 나오는 연극 ‘갈매기’는, 극중극 연극과 관객, 실제 연극과 관객, 극중극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까지 다양한 층위를 만들어낸다. 이 층위는 ‘관조’를 부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말했던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체호프’는 100년 먼저 연극으로 만들었다. ‘체호프’가 ‘톨스토이’의 말을 듣고 희곡 쓰기를 중단했으면 큰일날 뻔 했다. (‘톨스토이’는 ‘체호프’의 단편소설 실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상대적으로 희곡은 미숙하다 평했다.)

국립극단의 ‘갈매기’는 이 층위를 분명하게 살림과 동시에 그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공연 시작 전을 의미하는 암막은 그대로 무대가 되고, 극중극의 무대는 호수가 된다. 거울벽으로 나뉘어지던 공간은 ‘니나’에게 뿌려지는 비와 섞여 무대 전체가 하나의 꿈처럼 엉긴다. 그 속에서 ‘니나’는 자신의 현실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그 공간을 외면하며 카드놀이를 한다. 그 공간 안에서 ‘뜨레쁠례프’는 자살한다. 관객은 경계가 허물어진 무대를 통해 각 인물들에게 주어진 현실을 동시에 본다. 그리고 개중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국립극단의 ‘갈매기’는 6월 29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이수현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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