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20.11.26 목 16:00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리뷰
[리뷰] 관객의 감정이 극장을 장악하는 연극, 그 현장에서…연극 ‘터미널’

▲연극 ‘터미널’ 공연사진_프로젝트박스 시야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교성과 개별성이 공존해야한다. 하지만 이 둘은 좀처럼 공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둘의 균형이 완벽해지는 곳이 있다. 바로 터미널이다. 

타성과 자아의 균형이 필요할 때, 터미널로 가라

도시에 살면서 가끔은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거리를 하염없이 걸으면 된다. 매일 오가던 길이라도 자동차나 대중교통을 타고 타인의 시선을 불편해 하며 지나갈 때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걸으면서 보는 세상은 나의 동력으로 움직이고 나의 시선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나의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다.

터미널의 매력을 이미 알아챈 연출가 전인철  

터미널은 버스에 오른 뒤 낯선 사람들을 만나기에 앞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 내가 만날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며 자신의 삶과 조우하는 변곡점이 된다. 터미널은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인지시켜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번 연극 ‘터미널’은 터미널이라는 장소가 가진 매력을 잘 활용한 편이다. 특히 관객들이 서로 마주보도록 설치된 객석은 공연 내내 반대편 관객의 표정과 몰입도를 볼 수 있게 했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아도 어느 한 순간 나도 모르게 보게 된다. 반대편 객석에 앉은 관객의 반응에 따라 연극은 슬퍼지기도 하고 웃겨지기도 한다. 이는 양면 객석이 주는 독특함이다.

마주 설치된 객석은 연출가가 ‘관객의 태도에 따라 공연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여지를 많이 두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관객은 장면을 바라봄과 동시에 장면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아까지도 관찰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무대를 사이에 두고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건너편에 자리한 자아들에게 지금의 나를 노출하기도 하며, 나의 관점에서 상대의 자아를 관찰하는 동시다발적인 사고가 가능한 공간으로 연출됐다. 이는 앞서도 언급했듯 터미널이라는 공간이 가진 매력을 십분 활용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연극 ‘터미널’ 공연장면_프로젝트박스 시야

상대방의 패가 궁금하면 너의 패부터 정확히 보여줘라 

전체 에피소드 중 두 번째 이야기 ‘거짓말’은 관객의 감정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극적 흐름을 보여줬다. 이 이야기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던 두 남녀가 터미널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이라는 찰나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며 생겨난 거짓말에 대한 내용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첫 번째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같은 공간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자신의 전사를 털어놓은 형식의 이야기다. 차이점은 두 번째 이야기의 경우 첫 번째와 달리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기 위해 동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남녀의 감성이 엇갈릴 때는 둘의 동선이 교차한다. 남자가 자기고백을 하는 장면은 감정 고조에 따라 무대를 여러 번, 점점 빠르게 도는 식으로 표현했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찰하는 입장에서 보면 인물의 정서가 뚜렷하게 인식될수록 정서적인 동요가 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동선 표현 방식은 관객의 정서적 운동성에 생기를 부여했다. 가정이 있는 두 남녀의 흔한 ‘한눈팔기’ 헤프닝에 그칠 수 있었던 이 이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 삶에서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투영해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었다.

소재의 신선함, 그러나 구현의 아쉬움

첫 번째 에피소드의 경우 소재나 설정 자체는 네 개의 에피소드 중에 가장 신선하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같은 기억의 지점인 터미널에서 만나 일어난 이야기를 통해 세대가 바뀌어도 끊어지지 않는 운명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구현 방식이 그 소재의 신선함을 따라가지 못했던 점이 아쉽다.

이 이야기는 서로가 대화를 이어가면서 전사를 이끌어내는 구조로 진행됐고 말의 블로킹과 동시에 할머니로 등장한 ‘대(大)과거’의 등장으로 동선의 운동성 또한 활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성을 통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힘들었다. 마치 연극영화과 수업 즉흥 연기 시간에 대본 없이 주어진 상황을 연기하는 무대와 비슷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대사도 다른 에피소드에 비해 문어체의 뉘앙스가 강해서 레제드라마의 대사와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 에피소드에서 일어나는 일이 실재할 수 없어서 레제드라마라는 것이 아니다. 마치 공연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쓴 드라마 같은 느낌이라는 점에서 ‘레제드라마’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자고 외치는 미래, 현재, 과거의 세 여자는 흥미로우면서 희망적이며 유쾌했다.

▲연극 ‘터미널’ 중 ‘소’_프로젝트박스 시야 제공

우리도 이대로라면 결국 소가 될 것이다

창작자의 메시지, 전달성, 그리고 오락성까지 겸비한 에피소드를 꼽자면 단연 세 번째 에피소드다. 소처럼 일하다 소가 되어가는 남자이야기는 소가 된다는 것은 소처럼 일한 과거에 대한 결과라는 상징성을 담아냈다.

이 이야기는 대를 이러 소가 되는 한 집안의 가족사를 통해 노동을 강요하는 거대 담론 속에서 무력하게 노동만 하는 개인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그렸다. 평화의 댐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돌아와 소가 된 아버지, 사대강 현장에서 일하고 돌아와 소가 돼가는 첫째 아들을 통해 한국 사회에 개인에게 얼마나 강력하게 노동을 강요하고 개인성을 말살했는가를 되묻게 한다.

여기서 둘째 아들은 자신은 아버지나 형처럼 살지 않겠다며 소가 된 아버지를 팔아버리는 패륜을 저지른다. 그 둘째 또한 결국 꼬리가 생긴다. 작품은 이러한 모습을 통해 세대가 바뀌어도 악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한다.

작품은 시대의 소용돌이와 사회의 권력에 휘말린 개인, 점점 고착화된 노동의 고리에 대한 담론을 ‘소’라는 소재를 통해 풀어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사람에게 정해진 노동의 강도 이상을 일하고 소가 된 인간상은 오늘날 워커홀릭과 무한 경쟁에서 바둥거리는 한국 사회의 면면을 비판하기 적절하다. 만일 이 담론을 인물의 입을 통해서 언급했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동물의 특성을 인간에 이입해 쉽게 전달함으로써 관객의 극적이입을 높였다. 

▲연극 ‘터미널’ 중 ‘달’_프로젝트박스 시야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 하는 시간, 그게 바로 오늘 

네 번째 에피소드 역시 세 번째 에피소드와 비슷한 구조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네 번째 에피소드는 100여년 후 달 착륙장이라는 실재하지 않는 공간 설정을 통해 현재의 모습과 바로잡아야 할 모습에 대해 언급한다.

달 착륙장에서 만난 두 남녀는 첫 대화에서 서로가 얼마나 사이보그인지를 묻는다. 특히 남자는 자신의 기계화 정도를 자랑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젊은 애들 추세잖아요’라고 말한다. 이 남자의 존재는 스마트폰 및 통신기기 사용 시간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오프라인 만남보다는 온라인 접촉을 선호하면서도 스스로 인간소외를 인지하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의 현주소에 대한 비판이라 볼 수 있다.

플롯을 이끌어가는 소재는 기억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우고 싶은 기억과 남기고 싶은 기억을 나누어 스스로 ‘기억을 정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설정이다. 두 남녀로 상징되는 미래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과거’로 드러난 현재의 삶은 세월호 사건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을 조명한다. 한 개인의 기억으로 시작된 ‘과거’ 여행은 세월호 사건으로 연결되고 세월호 사건에 공감하는 관객과 더불어 흡착력 강한 담론이 된다.

작품은 기억 속 장면과 인물의 상황을 중첩시켜 메시지를 던진다. 극중의 여자는 세월호 사건으로 아이를 잃고 기억이 멈춰버린 한 여자의 모습과 동시에 자신의 로봇 강아지를 ‘내 새끼’라고 부르며 지구에 가면 꺼내주겠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는 세월호 관련 기억을 경험하고 괴로운 기억은 체험하고 싶지 않다며 화를 낸다. 작품은 이 모습을 통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은 쉽게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사회와 아픔에 무감각한 이들의 모습까지 드러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려는 노력이 엿보인 작품이다.

사건의 직접적 언급이 주는 장 단점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이번 작품은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터미널이라는 한정된 장소를 기점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러나 세월호, 사대강, 평화의 댐 건설 현장 등 직접적 사건을 거론한 점은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이 사건들에 대한 직접적 거론을 굳지 하지 않고 본질이 이야기하는 바를 풍부하게 표현해 실제적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방식을 활용했다면 보다 큰 울림이 있는 작품이 됐을 것이다. 사건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작품의 이해를 도울 수는 있겠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소재들에 대해 언급하는 작품인 만큼 본질을 언급하는 데 그쳤다면 관객이 스스로 사고할 여지가 많았을 것이다.

나여랑 기자  newstage@hanmail.net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나여랑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