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사중주’ 공연 장면_연희단거리패 제공

특정한 인물을 둘러싼 특정한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존재감에 대한 적극적인 확인, 그로 말미암은 욕망, 그 욕망이 낳은 권력, 권력의 정복이 불러일으킨 죽음이 어우러진 것이 바로 인생의 ‘사중주’이다.

권력과 정복의 종말을 위한 여성성

‘뤼시스트라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남성들의 정복과 전쟁에 종말을 고하고자 섹스 파업을 도모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남성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전쟁과 정복의 반복된 전복을 문제의 구심점으로 내세우는데 이 부분은 현대 사회에서도 아직 가시지 않은 화두이다. 이러한 맥락은 정복 전쟁에서 수복된 나라의 국민중 여성이 성 노예로 전락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한 것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뤼시스트라테에서 보여준 여성들의 집단 섹스파업은 풍만한 남성성에 대한 강력한 제단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권력의 중심에 여성이 하나 둘 자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성성으로 점철된 정복과 전쟁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념과 종교, 영토 분쟁의 구실로 발생하는 테러와 전쟁은 제1차, 2차 세계 대전의 후 폭풍이 미처 아물기도 전에 스멀스멀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최근 지구촌 곳곳에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테러로 인해 전운에 대한 견해도 나온다. 바로 제 3차 세계 대전이다. 기술과 과학의 발달이 정점에 도달했다고 일컬어지는 오늘날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어느 때보다 끔찍한 세기 말을 보내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전쟁의 역사와 분단의 시절을 살아낸 독일의 작가 하이너 뮐러는 오늘날의 이러한 상황을 예감이나 한 듯 희곡 ‘사중주’를 통해 세기 말의 상황에 놓인 두 남녀의 이야기를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최근 대학로에서 공연된 연극 ‘사중주’가 바로 그 작품이다.

▲연극 ‘사중주’ 공연 장면_연희단거리패 제공

‘사중주’는 야한 연극이 아니다

연극 ‘사중주’는 ‘남녀 간의 성 대결’, ‘야한 연극’ 이라는 단어로 ‘오기(誤記)’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실 이 작품은 하나도 야하지 않다. 메르테이유와 발몽의 정사 장면으로 시작된 이 연극은 섹스 장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비단 이 말은 탁자를 뒤덮고도 남을 하얀 천 아래에서 정사를 하는 두 남녀의 육체가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았다는 것만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정사 장면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는 동물적 본능이 아니라 상대의 육체를 통해 나의 존재감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하는 인간 근원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은 메르테이유와 발몽의 정사 장면이 하얀 천의 운동성에 기대어 표현되었고, 그 운동성은 서로에 욕망에 대한 갈증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써의 인간이 가진 심장의 운동성, 혹은 뇌의 운동성으로 치환된 표현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연극 ‘사중주’ 공연 장면_연희단거리패 제공

소재와 표현 방식의 균형을 잘 잡은 연출

인간이 가진 근본적 본성인 자신의 존재감의 표현은 권세와 정복의 욕구로 이어진다. 이렇듯 이 작품에서는 ‘성(性)’이라는 화려한 소재를 가지고 꽤나 무거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재와 구현의 균형성이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게릴라 극장에서 공연된 채윤일 연출의 연극 ‘사중주’는 단출한 무대와 절제된 동선을 통해 무대를 채워나갔다는 점에서 매우 균형감 있는 작품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심오한 소재에 대한 언급의 근거로써 많은 스펙터클을 활용했다면 오히려 산만하고 알아듣기 어려운 관념적 연극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배우들의 움직임과 에너지로 무대를 채워 작품에서 던지는 메시지인 인간의 존재성, 그리고 욕망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간소화 된 무대를 기반으로 이 작품에 등장한 유일한 미장센인 천을 활용한 대도구 활용, 배우 간의 활발한 블로킹은 하이너 뮐러가 던지는 메시지의 심오함을 최대한 관객이 집중도 있게 이해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연극 ‘사중주’ 공연 장면_연희단거리패 제공

서로 다름으로 조화된 연극

이 작품은 메르테이유와 발몽이라는 두 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두 인물 간의 연기 호흡이 굉장히 중요하다.
메르테이유의 연기는 정형화된 모습이다. 퇴폐적인 귀족 여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상대를 하대하는 말투 등에서 잘 알 수 있다. 반면에 발몽의 연기는 사실적이고 자연스럽다. 18세기 프랑스의 귀족 남자가 아니라 어디에도 있을 법한 혈기 충만한 남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뿐이다.

인물의 연기 스타일이 다르다는 점은 표면적으로만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아 모순될 것 같지만 사실 매우 타당성 있는 구조이다. 정형성 짙은 메르테이유라는 인물의 표현 방식은 지체 높은 부인이 가진 권위와 그 안에 싹튼 일탈을 이야기하기에 충분하고, 그녀를 뒤흔드는 남자 발몽은 그녀가 스스로 싫어하는 정형화 된 삶을 깨버릴 매력을 가진 남자라는 점에서 사실적이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게 맞다. 

▲연극 ‘사중주’ 공연 장면_연희단거리패 제공

메르테이유의 속 마음

메르테이유의 자기 존재감 확인과 권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의 감정은 양가적인 것인데, 이는 그녀가 무대 위에서 옷을 갈아입고 변한 외모를 가지고 남자 역할을 하게 되는 모습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옷을 갈아입은 후부터 시작된 것이 역할 놀이인데, 특히나 성을 바꾸어 놀이를 시작한다는 것은 남녀를 대결 구도로 표현하기 위한 맥락이라기보다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획득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발몽 역할을 할 때 메르테이유는 더 생기 있고 운동성 있다. 또한 발몽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을 빙자해 항상 우위를 선점하고자 한다.

발몽을 흉내 내는 메르테이유가 더 남성성을 모방할수록 발몽이 연기하는 또 다른 귀족 여인 뚜르벨은 더 나약하고 멍청하게 그려지는데 그럴수록 메르테이유라는 여자가 단순히 자신의 성적 욕망을 표현하려고 발몽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뚜렷해진다. 게다가 그녀는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들을 지속적으로 뱉어낸다. 염세적인 사고를 하면서도 세력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인간이 모습을 그린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배우 윤정섭, 아니 진짜 발몽

발몽은 메르테이유가 탄 독주를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죽어가는 과정에서 꺼져가는 자신의 목숨에 항거하지 않고 오히려 삶과 죽음의 의미 없음에 대해 말하는 메르테이유의 말에 반박을 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만일 발몽이 단순히 자신의 꺼져가는 죽음에 대해, 그것으로 대변되는 세력의 약화에 대해 항거하는 오열을 했다면 너무나 진부한 해석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연극 ‘사중주’의 발몽은 죽음의 과정을 느린 템포로 이끌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색채의 ‘오열’의 정서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관객에게 스스로 해석해야만 하는 능동성을 주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연극의 호평의 지점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 부분을 선정하고 싶다. 

나여랑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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