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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Flashback 74] 고전의 변주 '새로움 반 아쉬움 반', 유니버설발레단 ‘그램 머피의 지젤’

▲'그램 머피의 지젤'_유니버설발레단 제공

‘그램 머피의 지젤’은 유니버설발레단이 호주의 안무가 ‘그램 머피’와 함께 손잡고 만든 세계 초연작이다. 이 작품은 고전발레 ‘지젤’의 새로운 변주를 예고하며 제작 단계부터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원작 ‘지젤’과 안무가 그램 머피의 명성 덕에 이 작품에 쏟아진 기대 역시 거대하고 육중한 것이 사실이었다.

 

공개된 ‘지젤’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무용수의 다리를 가린 펑퍼짐한 의상, 국악기가 뒤섞여 낯선 느낌을 주는 발레 음악, 원작 ‘지젤’의 이야기에 ‘프리퀄’을 얹는 과감함,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하고 기괴한 연출과 분장까지. 작품 속 곳곳에 드러난 그램 머피의 천재성도 눈여겨볼 만하고, 한국적인 색채가 가미된 색다른 무대와 음악도 흥미로웠다.

 

울탄은 마을의 제사장 베르트와 결혼한 후 ‘지젤’을 낳는다. 울탄을 사랑했던 미르타는 쓰라린 배신감에 사로잡혀 자살한 후 사악한 영혼이 된다. 그녀는 밤의 악령들과 함께 남자들을 향한 복수를 시작하고, 마을의 제사장인 베르트는 신성한 크리스탈의 힘을 빌려 미르타와 악령들로부터 사람들을 수호한다. 이후, 베르트는 자신이 신임하는 힐라리온과 성장한 지젤을 이어주려 하지만, 지젤은 이를 거부한다. 어느 날, 마을 밖으로 나선 지젤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낯선 세계’의 알브레히트를 마주치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그램 머피의 지젤'_유니버설발레단 제공

 ‘그램 머피의 지젤’은 원작에 비해 캐릭터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특히, 주변 인물들을 이야기의 중앙으로 끌어와 인물들 간의 감정을 격발시키는 데 주력한다. 1막의 하이라이트 역시 ‘지젤-알브레히트-바틸드-힐라리온’의 4인무에서 지젤의 ‘매드신’으로 넘어가는 장면이다. 특히, 4인무는 그램 머피의 천재성이 돋보인다. 이 장면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네 사람의 관계를 춤을 통해 추상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드러낸다. 인물들은 마치 스크린 위에 영사되는 오버랩 기법처럼 서로 겹쳐지고 풀어지며 각자의 감정을 시적으로 묘사한다. ‘매드신’에서는 외려 직접적인 표현이 눈길을 끈다. 약혼자에게 상처 받은 바틸드는 알브레히트의 뺨을 때리고, 지젤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다가오는 사람을 격렬하게 밀어 넘어뜨린다. 그만큼 감정의 표현이 격정적이다. 1막의 마지막에는 지젤이 직접 밤의 악령들을 이끄는 미르타의 품으로 찾아드는 장면을 통해 ‘선’과 ‘악’이 무너지는 경계를 연출적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램 머피가 한국의 전통을 발레에 녹인 형식이다. 그램 머피는 한국의 전통적 요소를 제법 많은 부분의 안무와 음악에 가미했다. 지젤의 마을 장면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타악기가 전반적인 축을 잡는다. 특히, 지젤의 마을 사람들은 한복을 연상케 하는 폭이 넓은 바지나 치마를 착용한다. 안무도 마찬가지다. 지젤의 마을 사람들은 바지 밑단이 넓은 의상을 너울거리며 전통 무예를 떠올리게 하는 춤을 소화한다. 반면 알브레히트의 마을은 가죽 혹은 정장 형식의 의상을 입는다. 음악 역시 주로 현악기를 사용해 세련된 느낌을 강조했다. 상반되는 두 마을의 외형은 마치 ‘전통’과 ‘문명’의 메타포처럼 읽히기도 한다.

 

두 마을의 대립 장면은 작품 전체에 굵은 리듬을 주는 안무이지만, 서사적으로는 군더더기처럼 느껴진다. 두 마을은 금세라도 전쟁을 치를 것처럼 서로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춤을 춘다. 하지만 잠시 후 이들은 대립 장면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쉽게 화해의 춤을 나눈다. 고전발레에서 필수인 디베르티스망(춤의 향연) 즈음으로 여겨보아도, 서사적인 면에서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램 머피의 지젤'_유니버설발레단 제공

‘크리스토퍼 고든’의 음악은 징후로 사용된다. 음악은 작품의 전반적인 이미지를 그려낸 백그라운드 뮤직과 효과음으로서의 기능이 매우 뛰어나다. 현을 긁는 듯한 불균질의 음향은 이야기의 그로테스트한 긴장감을 조성했고, 가야감과 하프의 조화는 색다른 재미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고전발레 ‘지젤’은 테크닉적인 요소가 굉장히 강하다. 여성 무용수가 보여주는 화려한 회전과 점프, 포인트(발끝을 세우는 동작)를 세운 채 촘촘히 움직이는 동작들은 말 그대로 감탄을 부른다. 특히, 발레블랑(백색발레)에서 보여주는 우아하고 처연한 윌리들의 몸짓은 ‘지젤’을 대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램 머피는 발레블랑에서도 우아함 대신 기괴감을 택한다. 백발을 늘어뜨린 윌리들은 훨씬 더 간악하고 잔악하게 인물들을 유혹한다. 무덤에서 기어 나와 남자들의 다리를 붙들어 끌고 가려는 모습은 호러 영화를 연상케 한다. 여타 여성군무에서 보기 어려운 박력 넘치는 동작들은 무대를 장악할 뿐만 아니라 ‘악’의 기운으로 객석 전체를 압도한다. 윌리들은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진 촉수처럼 움직이면서 날카롭고도 재빠르게 사냥감을 낚아채며, 민첩하게 사냥감에 기생한다. 하지만 윌리들의 일사분란하고 역동적인 몸짓에 반해 소극적인 지젤의 움직임은 다소 연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양한 장점에도 ‘그램 머피의 지젤’은 어딘가 아쉽게 느껴진다. 작품은 ‘악’의 이미지를 강화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매력적인 비주얼을 만들었고, 2막 윌리들의 군무과 감정선을 충분히 드러내는 안무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낼 만 했다. 하지만 서사의 마지막에서 알브레히트를 구원하는 것이 ‘지젤의 숭고한 사랑’이 아닌 ‘베르트의 구조’라는 사실은 ‘그램 머피의 지젤’에서 가장 서운하게 남는 지점 중 하나다.

 

지젤은 원작과 같이 알브레히트를 미르타와 밤의 악령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강력한 미르타의 힘은 두 사람을 굴복시키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한다. 결국 이들은 지젤의 어머니인 베르타가 가져온 ‘크리스탈’에 의해 미르타의 희생자 목록에서 제외된다. 고전발레 ‘지젤’은 무대를 휘감은 숭엄한 지젤의 희생과 사랑을 기반으로 알브레히트의 회한이 몰아치며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램 머피의 지젤’에서 알브레히트와 지젤은 베르트라는 ‘우연’에 의해 구원되며, ‘크리스탈’이라는 초월적인 힘에 의해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젤의 희생이 흔한 ‘우연’으로 마무리 되는 순간 객석의 감동도 안개 숲속으로 흩어져버리고 만다.

 

‘지젤’ 역의 김나은은 마치 숲속을 뛰노는 흰사슴을 떠올리게 했다. 작은 체구에서 느껴지는 사랑스러움과 ‘매드신’에서의 터뜨려주는 감정연기도 인상적이다. ‘알브레히트’ 역의 강민우는 그간의 행적보다 한 단계 발전한 무대를 보여줬다. 훤칠한 외모도 역할에 잘 부합했지만, 그간의 노력이 엿보이는 무대로 감동을 선사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극적인 감정표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미르트 역의 홍향기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무대 전체를 압도했다. 풍부한 표정 연기와 몸짓은 ‘악의 화신’으로서 이야기의 커다란 한 축을 지탱했다.

 



정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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