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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불편한 진실을 불편치 않게 이야기하는 법”…연극 ‘푸르른날에’


연극 ‘푸르른 날에’는 5.18 민주 항쟁이라는 역사 배경을 기반한 작품이다. 때문에 이 연극의 정체성을 시대성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연극의 또 다른 정체성은 연극적 기호의 향연이다.

웰메이드의 이상을 향한 도전

사람들은 연극을 통해 자신을 보고 타인을 본다. 연극이 가진 현장성과 실제성 때문에 연극은 인간의 인생을 표현하는 가장 적나라한 장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연극에서는 배우가 등장하여 일상의 말을 하고 일상의 몸짓을 하며 극을 전개해 나가는데 이러한 요소가 연극적 사실성을 부여하는 핵심은 아니다. 연극에는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표현을 위한 왜곡의 장치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술의 경우 일상어를 쓰되 극장의 규모와 인물의 성향을 고려하여 말의 속도와 크기를 조절한다. 만일 사실적인 표현을 하기 위해 일상의 말을 그대로 무대 위에 가져간다면 전달력이 떨어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지기 쉽다.

움직임과 동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극적 상황과 인물의 성향, 무대 디자인에 따라 움직임의 크기와 동선의 활용은 실제 인간의 모습보다 과장된 모습으로 왜곡되어야 할 때가 많다. 가령 작은 공간에서 큰 동작을 할 때는 손동작만으로 전체의 움직임을 압축시켜 보여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왜곡의 기호들은 많이 훈련된 배우들이 펼치는 연극일수록 빛을 발한다. 왜냐하면 왜곡의 기호는 사실과 사실을 표현하는 왜곡이라는 경계의 지점을 표현하는 기호인 만큼 정확하게 짜인 호흡 안에서 표현되어야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관객이 잘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흡은 많은 시간을 함께 훈련한 과정이 있어야 도출해낼 수 있는 결과다. 한국 연극계에서는 오디션을 통해 때마다 새로운 배우를 모집해 연극을 만드는 것이 일상적 구도가 되어버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을 실현코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연극들이 왕왕 있어 반갑다. 벌써 5년째, 매년 5월이면 남산예술센터에서 어김없이 공연되어온 연극 ‘푸르른 날에’는 그래서 더욱 반갑다. 
 


개인과 역사의 경계에서

이 공연은 역사적 현장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 안에 휘말려 고민하고 고통 받았던 개인의 모습, 그리고 사랑에 대해 다룬다. 그러므로 역사적 맥락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전달과 인물들 간의 정서 전달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는 난제가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지점을 독특한 화술과 적극적인 동선의 활용을 통해 해결한다.

화술의 경우 신파조의 빠른 말과 정확하고 큰 말소리를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자칫 무겁고, 지루해질 수 있는 역사적 행적에 대해서는 신파조의 말씨로 말의 속도를 빠르게 하여 위트있게 전달했다. 전반적인 대사들은 일반적으로 본다면 조금 크고 과장 되었다고 생각할 만큼 정확한 발음으로 대사를 구사한다. 객석 어느 자리에 앉아도 배우의 말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표현한 것이다. 동선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이번 작품은 훌륭한 블로킹을 만나볼 수 있는 연극이다. 불안정한 일촉즉발의 시대 분위기는 대열을 맞추어 비슷한 동작을 반복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통해 매우 강렬한 색채로 표현된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젊은 날 정혜와 민호, 나이든 정혜와 민호가 동시에 등장해 자신들의 과거를 스토리텔링한다. 이 부분은 네 명의 배우가 등장하지만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두 사람의 감정 상태를 표현해야 하는 고난이도의 블로킹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연기 공간의 수직이동을 충분히 활용하여 이 부분을 표현한다. 중앙에 바닥을 파서 지하공간으로 수직 이동이 가능하게 만든 무대 디자인이 동선의 역동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조명 또한 동선의 역동성에 힘을 실었는데, 조도와 색채의 변화가 과감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조명은 장소변화를 표현하는 일등공신으로 활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불필요한 암전과 무대전환이 없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시청각적 미장센

남산예술센터는 삼면무대이면서 돌출무대이다. 따라서 어느 좌석에서든 무대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게다가 연극 ‘푸르른날에’에서는 객석 사방에서 배우들을 등장시키는 동선을 많이 활용한다. 이는 관객이 작품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관람할 수 있으면서도 작품의 일원으로 포함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연출이다. 이야기가 전환되는 시점에서 무대 전면에 불투명 막 뒤로 네 대의 큰 북이 등장한 것 또한 인상적인 상징물이다. 큰 북은 무대 공간에 붉은색 조명과 함께 배치돼 불안정한 시대상황에 대한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어지러운 현재에 대한 경고의 소리로써도 역할한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지점

상징이 곳곳에 배치된 이 작품에서 리얼하게 그려내는 것은 작품의 핵심을 이끌어가는 주제와 맞물린 지점이다. 작품에서 민호는 소위 지식인이다. 그는 가족의 일화와 역사적 사건의 혼재 속에서 개인이 사회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자기암시를 끊임없이 보낸다. 이 부분은 군의 총칼에 맞서 싸우자는 동네 젊은이들을 위해 투쟁만이 살길이 아니라고 회유하는 부분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역사에서는 젊은이들이 투쟁만을 원했던 것처럼 기록된 점이 있지만, 실제로는 민호처럼 그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민한 것이 그 시대 젊은이의 실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생이라 불리는 민호의 말 한마디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동네 젊은이들의 모습은 지식인의 말에 흔들리던 대중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분법을 걷어내니 두드러진 시대성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정부와 광주시민으로 양분하여 그리지 않는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형식으로 작품을 이끌지 않는다. 이것은 작품이 실제 인물과 고유명사들을 적나라하게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 드러난다. 또한 그러한 이분법 대신 당시 젊은이들의 의지적 삶을 ‘푸르름’이라는 시각성을 부여해 상징으로 도드라지게 만든다. 이는 역사라는 민감한 지점에 대한 완충제가 되어준다. 이야기에서 이분법을 걷어내니 역사의 현장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효과도 동시에 누리게 된 것이다.

1980년 5월을 그려낸 김남주 시인의 ‘학살2’를 떼로 낭독하는 장면 역시 같은 맥락이다. 역사적 그날의 보고를 떼창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굉장히 강렬한 미장센을 제시한다. 이 장면은 계몽연극이 표방했던 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색채가 강하다. 하지만 이 장면은 문학 작품을 차용하여 표현을 한데다 실제 인물을 거론하여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상 자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했다. 더불어 작품의 메시지는 확연히 전달 가능할 수 있도록 했다.

나여랑 newstage@hanmail.net
사진_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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