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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Flashback 67] “꿈을 버리면 너도 없다”…뮤지컬 ‘로기수’

아무리 잘 만들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작품들이 더러 있다. 반면, 어딘가 아쉬움이 남는데도 가슴 한켠이 이유 없이 요동치는 작품도 있다. 전자를 ‘잘 만든 작품’이라 칭한다면 후자는 아마도 ‘좋은 작품’이지 않을까. 물론 ‘잘 만든 작품’이 ‘좋은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잘 하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듯, 무대 역시 마찬가지다. 뮤지컬 ‘로기수’는 이러한 측면에서 ‘좋은 작품’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작품이다.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종전 후에도 수용소 내부는 여전히 이념대립이 극에 달해있다. 북한군 전쟁 영웅 로기진을 형으로 둔 로기수는 “양코배기 새끼들!”을 외치는 공산포로 소년이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미군 흑인 장교 프랜이 추는 탭댄스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수용소장 돗드는 로기수를 공개적인 무대 위에 세우겠다며 ‘딴스단(댄스단)을 조직하고, 그 사이 포로들 간의 이념대립은 절정에 다다른다.

뮤지컬 ‘로기수’는 종군기자 ‘베르너 비쇼프’의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다. 사진 속에는 성별을 알 수 없는 수십 명의 포로들이 복면을 뒤집어쓰고 춤을 추고 있다. 뒤쪽으로는 자유의 여신상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이한 풍경이다. 뮤지컬 ‘로기수’는 바로 이 사진이 함의하고 있는 복잡한 층위를 풀어내는 작품이다. ‘자유’를 상징하는 여신상 앞에서 ‘포로’들이 ‘춤’을 추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말이다.

작품은 주인공 로기수를 통해 현실과 꿈의 갈림길이 주는 갈등을 생생히 묘사한다. 첫 등장에서 로기수는 미국의 모든 산물을 거부한다. 미제 영화도, 미제 물건도, 미국인에게도 반감을 품는다. 하지만 춤은 다르다. 로기수는 춤을 통해 자신도 몰랐던 ‘꿈’을 깨닫는다. 타인이나 환경에서가 아닌 오로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게 된 것이다. 이후 로기수는 춤을 통해 타인에게도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특히, 프랜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프랜은 미국인이지만 동시에 미국이라는 사회 안에서 차별받으며 억압된 삶을 살았던 흑인이다. 두 사람은 ‘춤’을 통해 느끼는 진실한 자유를 공유하고 계급, 이념, 인종 간의 관계를 허물어간다. 그러한 일면에서 “미국은 싫지만, 딴스는 좋아!”라는 대사는 로기수가 느끼는 ‘꿈’과 ‘현실’ 사이의 혼동과 상황을 잘 응축한 대사라 할 수 있다.

로기진와 민복심은 이야기의 갈등을 더욱 깊게 굴착시키는 인물들이다. 동생을 위해 ‘인간 백정’이 되었던 형 로기진과 형을 사랑하면서도 꿈을 쫒고 싶은 동생 로기수의 갈등은 이제껏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반복되었던 ‘형제애’의 관습적인 표피를 그대로 복사한다. 하지만 작품은 영리하게도 탭 리듬 자체가 가진 열정과 희열을 담아 관객에게서 익숙한 눈물을 뽑아 올리는 데 성공한다. 민복심은 바로 이 눈물의 압축과 폭발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소년 로기수의 풋풋한 러브라인을 그리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꿈’을 꾸게 하는 동력이다. 특히, 민복심이 “꿈을 버리면 너도 없다/하루를 살아도 꿈꾸며 살아”라고 ‘당부’하는 장면은 이후 로기진이 “그 춤만은 안 돼”라고 애원하는 장면과 겹쳐지며 갈등의 양날을 날카롭게 세우는 역할을 한다.

 

주변 인물들은 로기수가 제기한 여러 ‘층위’의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넓힌다. 수용소 내부의 미제 제품을 몰래 팔아 나름 생존방칙을 구축한 ‘배철식’, 무용적 기질을 타고 났지만 방향 감각이 없어 팀의 구멍이 된 ‘황구판’, 거친 매력을 가진 양공주 ‘장개순’, 도쿄 태생의 춤꾼 ‘이화룡’ 등은 같은 상황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재치있게 드러낸다. 특히, 이들은 극의 웃음코드를 담당해 무거운 소재가 관객에게 잘 스며들 수 있는 소화제 역할을 했다.

여운을 남기는 명장면들은 절로 심장을 뛰게 만든다. 1막 마지막 장면, 춤을 추며 하늘로 솟구치는 로기수의 리프트는 춤을 출 때 그가 느끼는 희열과 행복감을 관객이 체감하도록 돕는다. 로기진과 로기수 형제가 함께 부르는 ‘각오 높게’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을 눈앞에 둔 두 형제의 진심을 담은 가사는 눈물의 빗장을 소리 없이 풀어낸다. 극의 후반부 “내 이름은 번호가 아니다”라고 항변하는 ‘딴스단’ 사람들의 면면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주제까지 자연스럽게 끌고 들어와 소매를 적시게 한다.

탭댄스 장면은 빠짐없이 감명 깊다. 특히, 이제 막 춤에 눈뜬 로기수가 일상 속의 소리에 리듬을 맞추며 발을 구를 때, 자신만의 리듬으로 프랜의 리듬에 응수할 때,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무대에 올랐을 때 등은 탭댄스의 리드미컬한 발 구름과 함께 관객의 가슴에도 큰 파동을 빚어낸다. 긴 공연 시간 내내 배우들은 땀으로 감동을 고스란히 전한다. 고도의 탭 실력을 보여야 하는 로기수 역의 김대현, 윤나무, 유일은 전작보다 한층 마른 것이 눈에 띌 정도다.

좋은 지점이 분명한 만큼 아쉬운 부분도 명확하다. 무대는 포로수용소의 느낌을 구석구석 잘 구현해 냈지만, 활동 폭이 좁아 답답한 느낌을 준다. 대신 조명이 이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조명은 쇼와 일상, 전쟁의 잔혹함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아릿한 감정들을 다양한 색으로 무대를 덧칠해 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또한, 이야기의 굴곡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줄 ‘킬링 넘버’가 없다는 점도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1막은 관객을 확 사로잡는 음악적 포인트가 없어 다소 밋밋하게 느껴진다. 1막 마지막 장면에서 몰아치는 탭 리듬과 기수의 리프트 장면은 뒤의 장치들이 훤히 관객에게 노출돼 어색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반면 2막은 드라마와 음악의 지점이 서서히 맞아떨어지며 몰입도가 훨씬 높아진다.

뮤지컬 ‘로기수’는 3월 12일부터 5월 31일까지 DCF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의 무대에 오른다.

 

정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_스토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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