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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슬픈 인연, 그래도 사랑하기 때문에”…연극 ‘슬픈 인연’

예술에 감동하는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은 거리를 걸으며 흥얼거리는 노래에 취하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이 순간이 자신의 감정과 진정성 있는 음악이 마주하는 최고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여기도 저기도 추억 여행 바람

7080 가요, 세시봉 콘서트, 조용필 신곡의 가요 차트 1위 행진 등에서 읽어낼 수 있는 최근 몇 년 동안 대중문화의 트렌드는 ‘기성세대의 추억 여행’ 정도로 정의 내릴 수 있다. 이는 기성세대들의 젊은 날을 호령했던 왕년의 인기 가수의 노래를 다시 부르는 ‘불후의 명곡’과 같은 프로그램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흥미로운 점은 왕년의 인기 가수의 히트곡을 오늘날의 인기 가수들이 다시 불러 지난 히트곡에 대한 향수를 가진 기성세대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지난 가요를 모르는 젊은 층들에게 이 곡들이 자연스럽게 소개돼 새로운 측면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이다. 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표현을 통해 대중의 눈과 귀를 현혹하겠다는 섹시 스타나 아이돌의 가요가 신세대 가요계를 점령하는 동안 한켠에서는 이렇게 조용히 기성세대의 추억 여행이 약진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찌 됐든 대중의 기호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다. 이렇듯 중후한 약진은 연극계에서도 조금씩 태동하고 있다. 약진이라 하기에 큰 울림을 준 김광림의 신작 연극 ‘슬픈 인연’이 바로 그 선두에 선 작품이다.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남자 윤석, 그리고 당신

연극 ‘슬픈 인연’을 단면적으로 설명한다면 중년 남자에게 어느 날 찾아온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흔한 막장드라마의 소재인 불륜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단순히 불륜 연극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자신의 잃어버린 인생을 찾지 못하고 30여 년을 살아온 한 남자의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남자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 정의 내리는 것이 더 정확하다.

작품 속 촉망받는 서울대 법대생 윤석은 민주화 운동을 하며 쫓기던 아버지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고,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다. 그렇게 고난의 세월을 보낸 윤석의 오늘날 모습은 파킨슨병에 걸린 아내를 돌보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윤석 앞에 30여년 만에 첫사랑 혜숙이 찾아오며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연극에서는 윤석의 인생이 꼬인 원인을 ‘아버지의 민주화 운동’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윤석이라는 인물을 극변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모진 세월을 견뎌온 기성세대로 확대 이입시켜 생각해본다면 고통의 원인을 민주화 운동으로 대변된 집안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년들이 격변의 세월을 버티며 맞았을 바람은 시대의 크고 작은 사건들 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윤석이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무대 뒤편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장면에서는 무대에 길처럼 배열된 가로등이 마치 기성세대가 걸어온 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젋은 윤석이 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 장면에서는 조명의 조도를 명과 암이 동시에 존재하도록 극단적으로 장치하였는데 이는 인생에 드리워진 명과 암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이다. 이러한 상징들을 통해 작품이 메시지가 개인사를 담담하게 그려내는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누가 누구에게 슬픈 인연인가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아왔을 윤석에게 아버지는 가족이면서도 슬픈 인연이다. 아버지란 존재는 그에게 꿈을 꿀 수 없게 하였으며, 사랑을 할 수도 없게 했기 때문이다. 윤석은 30여 년 전 혜숙과 첫키스를 한 다음날 일본으로 도피한 아버지 대신 정보부에 끌려가느라 혜숙을 떠나야 했고, 중년이 되어서는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사랑을 해본 적 없는 가슴으로 긴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해 상처를 준다. 그래서 혜숙에게 슬픈 인연은 윤석이 되고 만다. 윤석과 30여년 넘게 부부로 살면서도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고 모진 세월을 산 여자 순임도 윤석에게는 슬픈 인연이다.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묘한 관계로 살아온 순임과는 ‘가족’이라는 단어로 묶여 미움보다 더 지독한 세월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치유와 화해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방법, 음악

이번 작품에서는 개인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상처와 치유를 공론화하기 위한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음악의 전면화를 선택했다. 그래서 인지 클래식 음악의 삽입이 빈번하다. 특히나 밴드를 조성해 대회에 나가겠다는 설정을 통해 콘서트 형식으로 무대를 꾸민 장면은 연극적으로 새로운 형식미를 주기도 하지만 음악과 예술의 가치를 세대와 성별을 초월한 화해와 치유의 의미로 장치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부분은 작품 후반부에 배치된 콘서트 장면에서 절정으로 드러난다. 인물들이 각자 악기를 하나씩 맡음으로서 조합된 밴드가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와 나미의 ‘슬픈 인연’을 서툴게 연주하는 장면이 바로 그 지점이다. 두 곡 모두 가사가 있는 노래이지만 악기로 연주했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가사가 전달되지는 않는다. 이 두 곡이 잘 알려진 노래이기 때문에 굳이 가사를 전달할 필요가 없었던 점도 있지만 아마추어들의 진정성 있는 연주를 들으며 스스로 가사를 되뇌는 여백의 효과를 누리게 하려던 창작자의 센스가 돋보인다.

슬픈 인연, 그래도 사랑하기 때문에

요즘 유행하는 기성세대 추억 여행용 대중 예술에서 찾을 수 없는 이번 연극의 매력은 기성세대의 모습을 ‘복고’나 ‘추억’이라는 단어로 쉽게 담아내 휘발성 강한 콘텐츠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하고, 진정성 있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작품은 윤석과 윤석을 둘러싼 주변인들을 통해 젊은이들만큼 SNS를 활발하게 하고, 젊은이들만큼 여가와 문화를 누리는 기성세대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그들이 간직한 상처와 회한을 대중성 있는 음악을 통해 담담하게 드러낸 점이 그 부분을 뒷받침할 근거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대중적 흡입력과 작품의 시의성을 동시에 구사한 작품이라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인연이 때로는 슬프지만 그래도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지는 게 인생이라는 메시지를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와 나미의 ‘슬픈 인연’을 통해 적절하게 녹여낸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나여랑 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_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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