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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멜로 드라마’…“익숙한 추억의 향연”

‘Cliché(클리셰)’. 원래 인쇄에서 사용하는 연판(鉛版)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판에 박은 듯한 문구 또는 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클리셰는 모두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진부하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클리셰와 똑같은 것을 본 순간 그 곳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이때의 클리셰는 진부한 것이 아닌 ‘익숙한 추억’이기 때문이다. 

뮤지컬의 표현 방식을 연극에 접목시켜 정서를 극대화 하다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 등의 음악 프로그램들은 몇 년 전부터 한국 대중예술계에 부는 새 바람으로써 아직도 그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이 프로그램들의 인기요인은 노래를 가수 자신의 해석과 감정이 담긴 드라마 안에 집어넣어 한 편의 작은 연극처럼 연출해낸 것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뮤지컬의 정서 전달 방식과 매우 닮아 있다. 뮤지컬에서 음악은 감정의 완급을 조절하고 정서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역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뮤지컬은 관객의 호응을 음악적 표현으로 얻는 셈이다. 음악은 말에 비해 완급 조절이 용이하고 분명한 성격을 가진다. 반면 연극은 연기만으로 정서 전달을 하기 때문에 더 정교한 표현을 위한 고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뮤지컬만큼 정서의 완급 조절을 다이내믹하게 해낸 작품이 있다. 장유정 작, 연출의 연극 ‘멜로드라마’다.

음악으로 그리는 연극

‘오 당신이 잠든 사이’, ‘김종욱 찾기’ 등의 창작 뮤지컬 히트 제조기로 잘 알려진 장유정 연출의 히든카드는 역시나 ‘음악으로 그리는 연극’이다. 따라서 장유정 연출이 연극을 연출한다고 하면 음악으로 점철된 소위 ‘연극 빙자 뮤지컬’이 될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완벽한 오해이다. 이번 연극에서는 다양한 상황에서 겪게 되는 사랑의 정서를 붓으로 그림 그리듯 음악으로 정서를 무대에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연극에서 사용된 음악은 가사가 없는 연주곡과 서정성이 짙은 남미 음악 등 월드 뮤직 등이 주를 이룬다. 이는 가사로 정서를 전달하려는 일차원적 표현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연극 특유의 여백의 감성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고뇌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연출 응용편: 조명을 활용한 선택과 집중

작품은 음악적 감성을 풍부하게 활용하면서도 가사는 최소화 하여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전략을 쓴다. 이 부분에서 소리의 여백을 조용히 메운 것이 바로 조명이다. 흐름의 중심에 선 인물에게 조도 높은 빛을 비추는 식의 조명 디자인이 그 핵심이다. 이 작품은 큰 움직임이나 과장된 말투를 사용하지 않고 일상어를 구사하는 연기들로 진행되기 때문에 관객의 몰입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조명 디자인은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탁월한 선택이라 볼 수 있다.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장치한 또 하나의 방법은 작화조차 없는 심플한 무대 디자인이다. 상하의 위치 변화를 주된 동선으로 설정해 최소한의 장소 변화만을 알려주는 무대연출은 관객이 쓸데없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게다가 인물이 처해있는 상황과 공간에 대한 상상의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사실 이 방식은 영화에서 많이 사용되는 연출이다. 모든 행동이 전면적으로 노출된 무대 예술 장르에서는 이러한 선택과 집중의 표현이 다소 어렵다. 그런데 조명을 통해 강조점과 소실점을 분명하게 해둠으로써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는 이 방식은 연극에서도 제대로 된 선택과 집중을 구현하기 위한 보완책이 된다.

그림으로 극대화된 정서

그림이 등장한 작품의 처음과 후반부, 그리고 주요 장면들은 이러한 연출법을 활용하여 메시지 전달의 효율을 최고조로 높인 지점이다. 첫 장면은 큐레이터인 서경이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다. 조명을 서경과 그림에만 집중함으로써 인물의 운명에 대한 강한 암시를 드러낸다. 작품 중반부에 나오는 서경이 찬일과 미현의 불륜을 목격한 후 재현을 찾아가 술김에 재현과 키스를 하는 장면도 같은 맥락으로 연출 된다. 이 장면은 서경과 재현이 앉은 연기 공간 가까이에 그림을 배치하고 인물과 그림이 배치된 지점에만 조도 높은 빛을 노출해 정서를 부각시킨다. 게다가 격정적으로 키스하는 그림 속 남녀와 무대 위에서 키스하는 서경과 재현은 선택적으로 오버랩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은 대사가 전달해야 하는 정서를 그림의 삽입과 빛의 집중을 통해 극대화한 장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작정한 클리셰, 작정한 멜로드라마

연극 ‘멜로드라마’는 음악과 조명을 활용한 생명력 있는 연출 방식을 통해 완급이 없는 긴 호흡으로 극적 몰입이 떨어지는 정극의 일반적인 단점을 극복한다. 그런데 이야기의 구성은 고루한 소재와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루함’은 특정한 의도 없이 선택된 고루함이 아니다.

제목부터 ‘멜로드라마’라고 단 것을 통해 이번 작품이 강한 의도를 가짐을 예측할 수 있다. 내용은 예상대로 정형성이 강하다.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 서경과 무기력한 남편 찬일의 위태로운 부부 관계, 어릴 적 사고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미현과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재현 남매, 그리고 재현의 가족 같은 애인 소이는 멜로드라마에서 흔하게 등장해왔던 인물들이다. 이야기의 흐름 역시 예상대로 권태로운 부부와 상처받은 남매의 엇갈린 사랑, 불륜,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사랑을 소재로 다룬 다른 연극과 달랐던 점은 평범한 구성을 신선한 구성인양 포장하지 않고 오히려 멜로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클리셰를 총출동시켜 누구나 하나쯤 지니고 있는 ‘익숙한 추억’을 건드렸다는 점이다. ‘비’, ‘불륜’, ‘사랑’에 대한 정의가 바로 그것들이다.

 

멜로드라마의 공식1: 비, 불륜, 사랑에 대한 정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의 상징인 신파에서 그러하였듯, 이 작품에서도 비는 사랑의 매개체로 등장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찬일과 미현이 비 때문에 포옹을 하게 되는 장면과 서경과 재현이 같은 우산을 쓰면서 사랑을 느끼게 되는 장면은 ‘좋아한다’, ‘사랑한다’ 등의 대사 없이도 두 남녀의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의 공식2: 불륜

네 남녀의 엇갈린 사랑은 사실 불륜이다. 금지된 사랑의 상징인 불륜 역시 멜로드라마의 소재로써 스테디셀러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불륜을 들끓는 욕망의 색채로 그리지 않았다. 찬일에게 시끄러운 음악을 듣기 싫다고 했던 서경이 재현과는 신나는 음악을 듣고 싶어 하고, 써서 마시지 않던 소주를 마시게 되는 모습을 통해 새로운 사랑에 변화하는 인물의 모습을 점진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분명 클리셰이지만 뻔함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흡입력이 생겨난다.

멜로드라마의 공식3: 사랑에 대한 정의

멜로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클리셰는 역시나 ‘사랑에 대한 정의’이다.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한 정의를 관객이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배신을 하지 않은 유부남 찬일을 오히려 놓아주는 미현의 행동이나 재현 앞에서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면서 뒤에서는 계속 후회하는 서경의 행동이 바로 그 지점이다. 서경이 재현의 마음을 거절하는 전화 장면도 같은 맥락이다. 입으로는 만나지 말자고 하면서 마음의 거리는 가까워지는 것을 무대 위 몸의 거리를 좁히는 행동을 동시에 함으로써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의 정의를 한 가지로 국한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진부함의 덫은 진부함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재현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재현의 죽음 이후 찬일이 재현의 삶을 살게 된 설정은 억지스러운 지점이다. 이는 어렵게 이룬 사랑은 역시나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는 신파의 공식에 너무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전반적으로는 리얼한 사랑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면서 결말은 신파의 구도를 따르고 있다는 점은 클리셰를 이용했다기 보다는 극적 이입도를 떨어뜨린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무대 위에 작은 무대를 만들어 찬일이 잠시 극 속에서 나와 사랑의 본질에 대해 노래하는 장면 역시 작품 전체의 색채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이 장면은 메시지 전달과 볼거리 제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는 장점도 있다. 심오한 내용의 가사와 대사를 마이크 처리를 하여 강조를 하면서도 형형색색의 조명과 신나는 음악과의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 장면이 다음 장면과 연결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극의 통일성을 해치기 때문에 사족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클리셰는 멜로드라마의 정석이다

흔한 이야기가 정당화되는 작품, 클리셰를 제대로 활용한 작품이 바로 연극 ‘멜로드라마’이다. 더불어 가족과는 멜로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담긴 ‘사랑해서 결혼하면 가족 되는 거야.’와 같은 주옥같은 대사 역시 이 작품에 숨은 매력의 지점이다. 따라서 익숙한 추억 가득한 사랑이야기로 진득한 먹먹함을 이끌어낸 이번 작품은 스펙터클 없이도 할 말 다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전례가 될 것이다.

나여랑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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