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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마음의 집”…연극 ‘여기가 집이다’

자신이 몸담고 사는 공간을 ‘집’이라 한다. 몸담는 집은 명의가 누구냐에 따라 소유의 여부가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집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집이다. 하지만 마음의 집은 어디서 어떻게 사야 할지, 얼마를 내야 살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연극 ‘여기가 집이다’에서는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갖지 못한 ‘마음의 집’을 리드미컬한 극적 전개와 화술로 풀어간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탓하지 않아 더 내 얘기 같은 문제의식, 여기에 우리는 어느새 자성(自省)하게 된다.

집에 살면서도 집이 없는 아이들

IS(이슬람 국가)에 가입하겠다고 떠난 한국 청년 김군 때문에 새해부터 대한민국은 술렁이고 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인터넷 게임만 하던 18세 소년이 IS에 자진 입단하게 된 이유는 ‘진정한 소통의 부재’라고 한다. 김군이 학교 폭력에 시달린 경험이 있고, 세상과 단절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여성 혐오와 폭력성 짙은 성향이 증폭되기만 하고 바로잡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김군에게 진실한 대화를 나눌 상대가 있었다면 그가 IS로 가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그것도 자진해서 시리아 행을 택한 김군의 행동을 놓고 국가 대내외적 관계와 관련하여 여러 후속 여파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그것보다 현시점에서 더 크게 우려해야 하는 것은 소통의 대상이 부재하고, 마음의 집이 부재한 또 다른 ‘김군’들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이 오른 장우재 작, 연출의 연극 ‘여기가 집이다’에서도 IS행 보다 더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농후했을 또 다른 김군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할아버지 소유의 허술한 고시원 건물을 물려받게 되어 자칭 ‘가장’이 된 고등학생 동교가 바로 그 김군이다. 현실의 김군과 작품 속 동교는 지독한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 소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집에서 살면서도 마음의 집이 없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마음의 집을 찾아 떠난 김군과 달리 동교는 자기 스스로 마음의 집을 정한다는 점에서 맥락을 달리한다. 자신의 외로움을 타개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토로하여 마음의 집인 가족을 스스로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동교는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각자의 삶을 살고자 아들을 외면한 부모 때문에 버려진 신세로 한국에 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동교가 ‘김군’ 이상의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도 남을 상황이다. 하지만 동교는 가족과 떨어져 고시원에서 살고 있는 세입자들에게 무작정 가족이 되자며 끈기 있게 ‘대시’한다. 고단한 삶의 굴레 안에서 나름의 규칙을 만들며 고시원을 떠날 날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동교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삶의 균형을 깨트리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동교가 세입자들에게 건넨 ‘가장’이 되겠다는 말과 ‘가족’, ‘우리’라는 말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듣기에 거북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게다가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어린 아이의 말투를 아직 버리지 못한 동교를 통해 객석까지 전달되는 단어들은 어색함을 가중시키기까지 한다. 이러한 동교의 화술은 동교만이 유일하게 구사하는 화술이기 때문에 더 두드러지지만 동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어른들이 하지 못하는 진리의 말들이다. 이 진리의 말들은 곧 작품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동교의 말투는 창작자의 계산된 의도였으리라 판단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어색함과 집중이 공존하는 동교라는 인물은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가 이입된 응집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시대 변화에 맞서야 하는 기성세대, 만들어진 규칙과 맞서야 하는 젊은이들

그렇다면 왜 하필 아이도 어른도 아닌 동교를 등장시켜 작품을 이끌도록 장치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 작품은 어느 날 갑자기 건물주가 된 고등학생이 세입자 아저씨들과 겪게 되는 해프닝을 다룬 내용에 불과하다. 등장인물도 어느 때나 있을 법한 고단한 삶을 사는 인간들로 구성되어있어 이름이 없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무대 세트는 실재하는 집을 그대로 옮겨놨다는 인상을 줄 만큼 사실적이다. 집 내부는 나무의 색깔과 질감을 통일감 있게 드러내며 튀는 소품 하나 없이 배열되어 있다. 이 점을 보아도 이 작품이 인물 하나하나에 방점을 찍기 위한 작품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고시원은 동교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인해 변화를 겪는다. 이어 동교의 친구 종택이 등장하고, 그들을 시작으로 인물들의 가족들이 방문하는 등 고시원은 지속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은 동교라는 젊은이의 등장으로 시작된 일이다. 동교의 아버지가 아닌 동교로 건물주 자리가 빠르게 교체되면서 시작된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세대의 변화, 빠른 흐름 속에서 시대 변화에 맞서야 하는 기성세대와 만들어진 규칙과 맞서야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더불어 벗은 몸으로 고시원을 휘젓고 다니다가 세입자들의 미움을 사자 속상하다며 “텃새 X나 심해”라는 말을 내뱉고 다음 날 고시원을 떠나는 동교의 친구 종택은 교체되는 세대의 젊음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맨 몸과 한 없이 부족한 경험으로 세상과 어울려야 하고 세상의 온갖 텃새를 견디며 오늘을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냥 머무는 곳이 집이다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고시원은 ‘그냥 머무는 곳’이지 절대 집은 아니라는 고시원 사람들과 ‘그냥 머무는 곳이 집’이라는 동교의 아슬아슬한 동거는 쓰러져가는 변두리 고시원에 실제 할만한 이야기이다. 작품의 소재가 친숙한 점은 관객의 몰입을 유도할 만한 좋은 ‘거리’다. 하지만 작품에 등장한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 설정은 이미 오늘을 사는 관객들이 이전에도 많은 드라마에서 봤을법한 모습이며, 한 발짝도 진보하지 않은 모습이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조용한 성품의 최씨 아내와 활달함이 지나쳐 시끄럽기까지 한 양씨 아내의 앙상블, 고시생인 영민과 그를 기다리다 지쳐 갈등하는 애인 지혜, 아들과 갈등을 겪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장씨는 10년~20년 전 작품에서도 등장했을 법한 인물 군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억지스러운 표정이나 과장된 말장난으로 웃음을 유도하려는 코미디가 아닌 배우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웃음이 녹아들도록 작품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진부함은 희석되어 큰 오점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리드미컬 연극의 시도

작품에는 정말 요즘아이 같이 보이는 말과 행동을 하는 인물이 있다. 그는 동교의 친구이며 고시원에 잠깐 살게 된 종택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른들과 대립하는 종택보다는 어른들과 화합하려는 동교가 오늘을 사는 청년들의 모습과 더 흡사하고 볼 수 있다. 아이의 말투를 구사하는 동교는 어른처럼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며, 심지어 어른들에게 월급을 주며 일을 시킬 줄도 안다. 이는 아이처럼 보이는 동교의 겉모습 이면에 많은 것들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이미 어른들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사람의 마음을 사려면 돈을 주어야 한다는 소위 ‘사회의 논리’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동교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교가 내뱉는 말들은 동교 특유의 화술로 인해 더욱 똑똑히 들려 강조가 되고, 따라서 충분히 방점이 찍히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지속적으로 교훈적인 말만 쏟아내어서 극 후반부에는 지루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 같은 말투와 그 말투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이 균형감 있게 구사되었다면 충분한 리듬감을 살릴 수 있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 작품에는 리드미컬한 대사 전달에 최적화된 인물이 존재한다. 극 중반부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자작시인 ‘여기가 집이다’를 읊기까지 하는 최씨가 바로 그 인물이다. 최씨가 읊은 시에는 작품의 메시지가 응축되어 표현된다. 이 시는 말을 하지 않던 최씨가 아내가 자신을 찾아온 후 점점 마음을 열고, 열리는 마음만큼 말문을 조금씩 트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읊은 시이기 때문에 각인 효과가 크다. 만일 이 시를 가장 말이 많은 양씨가 읊었다면 아마도 각인 효과가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최씨 감정선과 행동, 작품의 메시지를 동일 선상에 놓은 뒤, 이 시를 기준으로 표현의 강도를 조절했기 때문에 인물의 감정과 행동, 그리고 작품의 메시지가 최대치로 끌어올려지는 섬세한 표현이 가능했다.

무대의 공간 구성 측면에서도 창작자가 표현의 리듬감을 살리고자 시도했던 지점이 있다. 무대 위에 통째로 등장한 집에는 여러 칸으로 나뉜 삶의 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사는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이는 마치 영화에서의 화면분할과 같은 효과를 내는데, 이러한 시도를 통해 관객은 한 사람의 삶만을 집중적으로 보라는 강요를 당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인물들의 삶을 관찰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은 누구의 삶을 중점적으로 보고 누구의 삶을 흐릿하게 볼 것인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리듬감이 형성된다. 그런데 절반 밖에 드러나지 않은 옥상 공간은 아들과 심한 갈등을 겪는 장씨가 아들과의 전화 통화를 하는 공간으로만 쓰여 활용도가 비교적 낮다. 고시원에 사는 사람은 동교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나 되는데 이 비밀스러운 공간을 그냥 장씨의 아지트로만 활용되었다는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암전이 매우 빈번하게, 그리고 매우 짧게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삶의 단면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단기적 몰입의 효과를 주면서 동시에 암전을 기준으로 극적 몰입의 흐름을 끊는 기능을 한다. 이는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측면의 기능이 아니라 암전 이후에 이어지는 새로운 내용을 빠르게 이입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러한 구성의 암전은 인물의 군상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이번 작품의 구현방식으로 탁월했다고 본다.

이렇듯 이번 연극 ‘여기가 집이다’는 작품 곳곳에서 리듬감이 느껴지는 섬세한 구성을 시도 한다. 특히나 드라마의 흐름과 연기를 모두 활용하여 극의 리듬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한 점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작품을 볼 때 두 앙상블을 통해 작품 속 숨겨진 리듬들을 찾는 것도 흥미로운 감상 포인트가 될 수 있다.

 

 

 

나여랑 newstage@hanmail.net
사진_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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