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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Flashback. 58] 질문과 질문의 상호작용…연극 ‘프랑켄슈타인’

질문의 연극이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현실의 문제를 끌어들이는 동시대적 판타지다. 질문들은 공연 내내 우박처럼 쏟아진다. 신, 과학, 인간, 사회, 윤리, 종교 등의 문제는 이야기의 맥락을 타고 여기저기 탁탁 뛰논다. 끊임없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무대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이 연극과 대화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결말은 질문과 질문 사이에 관객의 사유가 들어설 때야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이 이 연극의 진정한 힘이다.

연극 ‘프랑켄슈타인’은 2011년 영국 국립극장에서 초연했다. 초연 당시 드라마 ‘셜록’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한국 공연은 영국의 대본을 가져오긴 했지만, 전반적인 수정을 거쳤다. 무대부터 의상, 결말도 달라졌다. 이번 공연은 원작의 의도를 해치지 않으면서 새롭게 해체하고 직조한 한국형 ‘프랑켄슈타인’이다.

천재적인 과학자 빅터는 생명 창조와 관련된 연구 중 ‘크리처’를 탄생시킨다. 하지만 빅터는 그의 흉측한 외모에 놀라 달아나 버리고, ‘크리처’는 버림받은 채 세상 속으로 나오게 된다. 사람들의 멸시를 피해 살아가던 그는 눈먼 노인 ‘드 라쎄’를 만나 세상에 대해 교육받게 된다. ‘드 라쎄’는 1년이 지나면 자신의 가족에게 그를 소개시켜주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드 라쎄’의 가족은 크리처의 생김새를 보고 경악하며 내쫓는다. 거부당한 크리처는 ‘복수’를 다짐하며 ‘드 라쎄’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창조주 빅터를 찾아 나선다.

 

작품 속 창조라는 이름의 원죄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대물림된다. 빅터와 크리처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지만,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맺어진다. 빅터는 전염병으로 아버지를 잃은 후 ‘생명 창조’를 꿈꾸게 되고, 그 결과물로 크리처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부성이 결핍된 빅터는 크리처를 제대로 끌어안지 못한다. 결국, 부성의 결핍은 크리처에게 이식된다.

빅터와 피조물은 ‘평행 이론’처럼 서로의 궤적을 답습한다. 두 인물은 아버지를 잃음과 동시에 가족을 잃는다. ‘사랑’을 찾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악하는 광기도 흡사하다. 이 연극의 메인 카피인 ‘떠나지 마, 혼자 두지 마, 우린 하나야’처럼 두 사람은 다른 존재이면서 동시에 하나임을 지향하는 존재들이다. 연극은 ‘결핍’이 낳은 ‘또 다른 결핍’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에 대해 크리처의 시점으로 파고들어 간다.

부성의 부재를 더욱 부각시키는 것은 모성이다. 한국 공연에서 여성으로 설정된 ‘마담 프랑켄슈타인’과 ‘드 라쎄’의 존재는 두 인물에게 모성을 체감시키는 인물들이다. 모성을 잃은 순간, 이들의 광기는 극에 달하고 버림받은 상처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드 라쎄’와 ‘마담 프랑켄슈타인’을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크리처의 인간다움’과 ‘빅터의 비인간성’의 대립도 흥미롭다. 빅터는 크리처의 인간다움을 부정한다. 크리처가 사랑을 묘사할 때도, 지식과 논리로 가득한 토론을 펼칠 때도 실험의 ‘부산물’이란 명목으로 무시하고 억누른다. 반면 크리처는 끊임없이 인간적 삶에 몸을 실으려 한다. 설득이 안 되면 애원을, 애원이 안 되면 복수로서 달려든다. 복수가 무엇이던가. 각종 권모술수로만 가능한 인간만의 성역 아니던가. 신의 영역으로 편입하려는 빅터와 인간의 영역에 스며들려는 크리처는 ‘사랑’의 잃은 존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한 목적지까지 빠른 속도로 계속해 내달린다.

연극 ‘프랑켄슈타인’의 희열은 두 사람의 관계가 완벽히 전복되는 결말에서 정점을 찍는다. 한국 공연의 결말은 영국 버전과 완전히 다르다. 영국 버전은 달아나는 크리처와 그 뒤를 쫓는 빅터의 모습이 마지막이다. 반면 한국 버전 결말은 훨씬 더 호전적이다. 크리처는 빅터와 정면 대결을 할 뿐 아니라, 심지어 그 대결에서 승리한다. 오프닝에서 빅터의 대사였던 “서! 가! 착하지”는 엔딩에서 크리처의 대사가 된다. 주종이 바뀌는 순간의 강력한 한 방은 한동안 뒤통수 주변을 서성거리며 떠나지 않는다.

아쉬운 점도 있다. 작품이 초점이 크리처에게 맞춰지면서 빅터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데면데면해졌다. 작품은 링거 스탠드를 끌고 다녀야 할 정도로 빅터가 쇠약하게 된 계기도, 그가 왜 광적으로 연구에 매달리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짧은 대사로만 축약한다. 빅터 역을 맡은 배우 이율은 완벽을 향해 내달리는 젊은 박사를 순수와 광기로 그려냈다.

크리처 역의 박해수는 대체 불가능이다. 그는 연극 ‘됴화만발’에서 보여준 기괴함과 ‘오이디푸스-더 코러스’에서 응축했던 고뇌들을 이 무대에서 폭발시킨다. 그가 보여준 신체 언어의 힘도 크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눈에 언뜻 외로움과 슬픔이 비칠 때면 관객은 속절없이 그를 연민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비닐 무대는 ‘원죄의 숙명’에서 달아날 수 없는 두 인물의 서식지다. 차갑고 불투명하며, 흰 배경들은 불 꺼진 의학병동의 한구석을 바라보는 듯 서늘하다. 특히, 비닐로 둘둘 감긴 소품들은 비릿한 살인의 뉘앙스를 풍긴다. 무대는 소재가 지닌 불투명성, 투과성, 상징성을 한데 어우르며 새로운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전체 무대와 어우러진 불규칙적이고 기괴한 음향효과, 그로테스크한 테마송은 작품의 여운을 더욱 길게 견인한다.

연극 ‘프랑켄슈타인’은 11월 9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오른다.

 

 

정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_백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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