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가을소나타’는 스웨덴은 잉마르 베르히만(Ingmar Bergman)의 영화를 연극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등장인물 중 어머니 ‘샬롯’은 성취욕과 자기애가 강한 피아니스트다. 그런 어머니 그늘에서 자랑 ‘에바’는 애정 결핍 증세를 보인다. 7년 만의 재회는 두 사람 사이에 잠재된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이번 공연은 임영웅 연출 데뷔 60주년을 기념해 무대에 오른다. 작품에는 ‘샬롯’, ‘에바’, ‘빅토르’, ‘엘레나’ 등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그 중 어머니 ‘샬롯’과 큰딸 ‘에바’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샬롯’ 역은 손숙이 맡는다. ‘에바’ 역은 서은경이 연기한다. ‘빅토르’ 역은 한명구가 분한다. ‘엘레나’ 역은 이연정이 함께한다.

엄마 ‘샬롯’을 위한 변(辯)

엄마가 되는 것이 두려운 여자가 있다. 여자는 엄마가 되고 나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두려움은 무지(無知)를 이끈다. 무지는 곧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로 그녀를 인도한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훈육법은 소통 없는 일방통행으로 점철된다. 가령 훈육은 ‘내 아이는 여자아이니 여자아이답게 치마를 입어야 한다’, ‘여드름이 난 아이를 위해 피부과 의사를 데려온다’, ‘그 남자는 믿을 만한 녀석이 아니니 당장 헤어지게 한다’ 등과 같은 형식으로 발현된다.

강압적으로 보일 수 있는 그녀의 훈육법은 ‘샬롯’ 입장에서는 최선이었다. ‘샬롯’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기에,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사랑받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거나, ‘엄마란 이런 것이다’라는 사례를 보지 못한 경우에는 삐뚤어진 모녀관계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는 ‘엄마’의 역할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하면 될까?’ 고민하는 날이 늘어갈수록, 고민 대신 도망을 선택하는 날도 늘어갔다. 조금이라도 잘못 만져 유리가 산산조각이 날까봐 두려웠다. 극 중 ‘샬롯’은 ‘에바’에게 “난 엄마라는 내 모습이 어색하고 불안했어”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샬롯’의 불안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 불안은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그는 “난 네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어”라며 ‘엄마’의 역할을 부정하는 단계에 이른다.

7년 만에 방문한 딸의 집은 그래서 편안하지만은 않다. 내 집인 듯 편하게 머물러도 마음 한구석은 불편함으로 가득 찬다. 딸 ‘에바’가 챙겨준 잠자리도, 차려준 저녁식사도 행복함을 전해주지 못한다. ‘샬롯’은 딸 앞에서 가면무도회를 하듯 자신을 숨기려 애를 쓴다. ‘에바’가 예상하는 자신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방을 나서고, 딸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제 이야기하기 바쁘다.

모녀의 애증 관계는 일방적 강요에 의해 형성된 것만은 아니다. 한쪽에서 보여준 소통의 거부, 회피, 도망이 결국 관계 회복을 기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샬롯’은 불편한 순간,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도망친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새로운 자리에서 ‘엄마’라는 무게를 내려 놓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자신을 옥죄는 가족과 딸에게서 벗어나 더 멀리, 더 가볍게 날고 싶은 마음뿐이다. 황급히 도망치는 순간에도 그녀는 괜찮은 척, 씩씩한 척 자신을 포장도 잊지 않는다.

딸 ‘에바’를 위한 위로(慰勞)

‘에바’는 오랜만에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엄마를 맞이할 준비로 바쁘다. 이불도 새로 펴야 하고, 침대는 엄마가 좋아하도록 딱딱하게 바꿔야 했다. 음식은 엄마 입맛에 맞춰 준비해야 했고, ‘엘레나’의 존재를 숨긴 것에 대한 야단을 대비해 마음의 준비도 해야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는 오랜만에 만났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에바’는 그 순간부터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마주한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어, 엄마한테 잘 보이려 노력했던 딸 ‘에바’로 회귀한다. 피아노를 칠 때에도 한껏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엄마가 보고 있으니 잘 쳐야 하는데, 내가 곡을 해석한 것이 엄마와 다르면 어떻게 하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반응은 차갑다 못해 날카롭고, 아프다.

7년이라는 시간은 ‘에바’를 변화시켰다. 그는 여전히 ‘샬롯’의 딸이지만 예전처럼 약하지만은 않았다. 적응 기간은 분명 필요했다. ‘에바’는 엄마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며 그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한 엄마와 여전히 그런 엄마로 인해 상처받은 어린 시절 자신이 싫었던 그는 결국 폭발한다. ‘왜 그랬어’라는 한마디가 모든 것을 무너트렸다. 가슴 속 응어리진 감정들은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에바’의 감정은 꽤 오래전부터 쌓여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쏟아냈다.

‘엄마에게 나라는 존재는 잠깐 가지고 노는 인형이었어요’라고 말하는 ‘에바’의 표정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엄마 ‘샬롯’이 딸을 위해 해준 모든 일은 ‘에바’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돼 터졌다. 그는 엄마의 사랑이 절실했다. 그녀에게 엄마는 아름다웠고 위대했다. 그런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참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었다.

‘에바’ 자신의 생각을 펼치거나 엄마의 말을 거역하기라도 하면 엄마에게 버림 받을까, 미움받을까 전전긍긍하는 날이 늘어갔다. 즐겁지 않아도, 행복하지 않아도 즐거운 척, 행복한 척하는 것이 ‘에바’에게는 일상이 됐다. 오래전 그날, 피부과 의사가 처방해 준 연고 냄새가 고약해 싫다고 말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에바’가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순종’을 택했듯이, 엄마 ‘샬롯’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가슴 속 응어리는 터졌는데 여전히 엄마와 딸의 사이는 좀처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딸은 이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는데 엄마는 이미 멀리 떠난 후다.

백초현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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