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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Flashback. 43] 꿈꾸는 자의 뒷모습, 뮤지컬 ‘바람의 나라’

무휼이 돌아선다. 나아간다. 양팔을 느리게 흔들거나 잠시 멈칫거리기도 하면서. 그는 죽은 아들 곁을 지나, 피 흘린 자들의 혼을 지나 그렇게 간다. 감내해야 할 상처가 너무 크다. 하지만 간다. 견뎌야 하고, 이겨내야 하며, 나아가야만 하는 길. 가야 할 곳은 ‘부도(이상향)’다.

뮤지컬 ‘바람의 나라’를 떠받드는 것은 무휼과 호동의 ‘부도’다. 부도는 한 국가가 나아가야 할 이상향이다. 무휼은 현실적 명분으로서의 부도를 위해 전쟁을 벌이고, 아들 호동은 아버지의 부도를 흠모하면서도 평화로운 이상적 부도를 꿈꾼다. 두 사람의 부도는 서로 다른 믿음 속에서 충돌하고, 부닥친다. 이들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무휼의 부도는 하늘나무 위, 호동의 부도는 하늘나무 아래’라는 대사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부도가 결코 병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휼은 ‘약하기 때문에 빼앗기는 것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다. 반면, 호동은 ‘피 흘리지 않아도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고 토로한다. ‘빼앗기지 않는 것’과 ‘피 흘리지 않는 것’이 등식을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결국엔 둘 중 하나가 무너져야만 ‘운명’인 것이다. 작품은 그 운명의 무게를 견디려는 두 사람을 통해 인간의 ‘꿈’과 ‘숙명’에 대해 말한다.

뮤지컬 ‘바람의 나라’는 서사가 탄탄한 작품은 아니다. 원작 만화 ‘바람의 나라’는 유리왕부터 대무신왕(무휼), 그의 아들 호동에 이르는 대서사시를 담는다. 여기에 그들의 신수와 신화적 상상력이 더해져 틀은 한층 더 복잡해진다. 뮤지컬은 그중 ‘무휼’의 이야기만을 가져오지만, 너른 원작의 바다는 좀처럼 꽉꽉 찬 내러티브를 편히 내주지 않는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자막이 설명을 더해주고, 강렬한 이미지가 서사의 빈자리를 든든하게 채워준다.

 

이지나 연출가는 미장센의 힘을 제대로 갖고 논다. 그는 동양적 정서를 십분 활용하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특히, ‘이지와 무휼의 첫날밤’ 장면은 흰 천과 상징적인 안무로 풀어내 야릇하면서도 절제된 감정 연출이 압권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는 유독 길고 깊게 남는 장면들이 많다. 12분간의 긴박한 ‘전쟁 장면’이나 현대무용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무휼의 독무’는 객석의 감각을 일깨우는 명장면 중 하나다.

안무와 음악, 서울예술단의 에너지가 조화된 명장면은 단연 ‘전쟁 장면’이다. 약 12분의 상연 시간은 그야말로 ‘전쟁’이다. 첫 장면은 민첩하게 발을 굴리는 군사들의 움직임으로 시작된다. 암전된 사이, 조명 사이로 군사 여럿의 다리가 드러나면 역동적 발 구름이 시작된다. 규칙과 불규칙성의 리듬이 오간다. 긴장이 오르면 사락이는 상대의 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어 등장한 주요 인물들이 무대를 날아다니며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토해낸다. 땀에 젖은 장면이 후엔, 객석에선 아낌없는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그야말로 ‘땀’의 결실이 만들어낸 전율이다.

영상과 조명의 앙상블은 담백했던 무대에 제대로 간을 한다. 지난 공연이 절제된 배경과 조명을 선보였다면, 올해는 바닥과 샤막, 벽을 뒤덮는 화려한 조명과 영상 기법을 통해 판타지적 감성을 더욱 자극했다. 특히, 영상은 서울예술단이 ‘잃어버린 얼굴 1895’, ‘푸른 눈 박연’, ‘소서노’를 거치며 쌓아온 내공이 엿보였다. 구원영 무대 디자이너의 조명은 무대에 날개를 달았다. 조명은 ‘생과 사’를 오가는 시공간의 변화, 공간과 인물 관계에 따라 순발력 있게 변화하며 작품에 입체감을 입혔다.

작품의 길고 먼 여운은 음악에서 우러나온다. 작곡가 이시우의 음악은 어렵지 않은 멜로디 라인과 신비로운 선율로 단박에 귀를 사로잡는다. 드라마 ‘하얀거탑’의 배경으로 쓰였던 메인 테마 음악도 아름답지만, 해명과 새타니가 부르는 ‘저승새의 신부’, 이지의 ‘모래꽃’ 등의 중독성도 ‘어마무시’하다. 

뮤지컬 ‘바람의 나라’는 배우의 아우라가 중요한 작품이다. 특히, 무휼은 삶을 초월한 듯한 초연함과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해야 한다. 초연부터 무휼의 역할을 빠짐없이 맡아온 고영빈은 체화되어 나오는 아우라로 무대를 휘저었다. 존재감으로 움직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걷는 것조차 안무로 만드는 포스는 그 아닌 ‘무휼’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극의 마지막 장면은 호동의 죽음 뒤, 흩어지는 영혼들 사이로 돌아들어가는 무휼의 뒷모습이다. 꿈꾸는 자의 무게를 견디고 나아가는 뒷모습은 서럽지만, 암울하지는 않다. 그가 어떻게든 나아갈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막이 내릴 때쯤이면, 슬픈 인간의 운명을 대변하는 혜압의 한 마디가 가슴 언저리를 서성거린다.

“사람들이 정해진 길로 가네. 그래도 꾸어야 하는 꿈. 그래야 세상이 허무하지 않지.”

운명이 정해져 있더라도, 우리는 결국 꿈을 꾸어야 한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거슬러 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슬픈 숙명이 아닐까. 뮤지컬 ‘바람의 나라’가 오래도록 가슴을 떠나지 않은 것은 그 담담한 받아들임 때문일 것이다.

 

 

 

정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_서울예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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