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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여신님’이었습니다,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

 

연일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여신의 조건은 이렇다. ‘예쁠 것, 못 생기지 말 것, 아름다울 것.’ 이쯤 되면 여신은 말만 신이지, 인간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피조물일 뿐이다.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도 그런 작품인 줄 알았다. ‘아름다운 여신님을 향한 찬송가’ 후렴 쯤 되는.

 

그런데 이 작품, 여신 아닌 여자들에게 위로 좀 된다. 불현듯 무인도에 떨어진 ‘짠 내’ 나는 여섯 남자의 여신님은 어디선가 본 듯한 ‘가장 보통의 존재’다. 만약 내 남편이, 남자친구가, 아버지가 무인도에 갇혔을 때 떠올리는 얼굴은 누구일까. 김태희가 이길까, 내가 이길까?

 

사랑하는 그대, 내 동생, 오마니…내 얘기 잘 들어요!

 

한국전쟁 중 국군 대위 ‘한영범’은 인민군 포로를 수용소로 이송하라는 특명을 받는다. 부하 ‘신석구’와 함께 이송선(移送船)에 오른 ‘한영범’은 이송하던 인민군 포로들의 습격을 받고, 배는 고장난 채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인민군 막내 병사 ‘류순호’만이 이들 중 유일하게 배를 고칠 수 있지만 그는 전쟁 후유증으로 정신줄을 놓아 버린 상태다. ‘한영범’은 기지를 발휘해 무인도를 지키는 여신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류순호’는 여신님을 위해서 배를 수리해 나간다. 무인도에 남겨진 병사들은 국군, 인민군 할 것 없이 ‘여신님 이야기’를 사실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전반부의 핵심은, 없는 여신님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는 것이다. 작품이 이것을 위해 선택한 무기는 극한의 상황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처음 이송선이 무인도에 불시착할 때 살아남은 국군은 ‘한영범’ 혼자다. 인민군 포로 4명 사이에서 그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한 명이라도 제 편이 있으면 모를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말고는 방법이 없다. ‘한영범’은 죽음의 직전에서 더욱 그리워지는 딸애의 이름을 내뱉고, ‘류순호’가 관심을 보인다. 그는 비상한 머리를 굴려 소중한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류순호’에게 심어주고, 그렇게 여신님이 태어난다.

 

 

죽은 줄만 알았던 국군 병사 ‘신석구’가 나타나자 극은 활기를 띤다. 그는 여신님 이야기의 첫 번째 공범이자 증인이 된다. ‘류순호’가 궁금해하는 여신님의 자태를 묘사하면서 그는 이룰 수 없었던 첫사랑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다음은 인민군 ‘변주화’의 누이동생, ‘이창섭’의 어머니가 여신님이 된다. 각자의 아픈 이야기가 모두의 앞에 펼쳐지고 ‘여신님’의 존재감은 점점 짙어져 간다.

 

작품은 병렬적으로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풀어내지만 한 토막의 변주를 주어 흐름을 바꾼다. 가장 마지막에 소개되는 인민군 ‘조동현’의 여신님이다. 그에게는 그리워할 여신님이 없지만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월남하려는 아버지를 향한 ‘왜 남(南)입니까!’라는 물음, 그리고 돌아오는 ‘그럼 넌 왜 북(北)이냐?’는 되물음. 답을 찾지 못한 그는 여신님으로 대변되는 따뜻함과 희망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가겠다고 선언한다.

 

일동은 여신님의 단꿈에서 빠져나온다. 그들이 맞대고 있는 건 여신님의 보드라운 옷자락이 아니라 날카로운 현실이다. 배를 고치면 남으로든 북으로든 가야만 한다. 한쪽은 무조건 죽는다. 이들은 맨 처음 이송선에서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었던 것처럼 다시 눈을 홉뜨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아프고 아픈 이야기들은 저마다의 가슴을 후벼 팠고, 그 깊이만큼 서로의 온기로 채워 넣었다. 하지만 감히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흔한 인사말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선다. 꿈에 그리던 여신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노오란 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_스토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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