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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도 무대가 무섭다” 배우 임강희

청초한 외모, 단아한 눈빛, 맑은 소리. 배우 임강희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정작 임강희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녀를 한 마디 단어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녀는 2004년 뮤지컬 ‘베르테르’로 데뷔한 후 ‘소나기’, ‘내 마음의 풍금’에서 참한 여성상을, ‘달고나’, ‘뮤직 인 마이 하트’, ‘김종욱찾기’에서는 밝고 명랑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근래엔 뮤지컬 ‘투모로우 모닝’, ‘글루미데이’, 연극 ‘오이디푸스 더 코러스’에 출연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기의 진폭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도전 의식이 강한 배우다. 수많은 창작뮤지컬이 장식하고 있는 필모그래피만 봐도 이 ‘배우의 뚝심’을 짐작할 만하다. “연기 전공생이 아니었기에 늘 연기에 목말라 있었다”는 임강희는 지금도 매 순간 무대를 갈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도전하는 배우, 임강희를 만났다.

“사고뭉치 어린 시절”

임강희의 어린 시절은 ‘명랑 쾌활’ 그 자체였다. 음악을 좋아해 어디든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TV에 나오는 가수들을 보고 똑같이 따라하거나, 아무 가게나 들어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끔은 명랑이 지나쳐 어머니가 경찰서에서 그녀를 찾는 일도 있었다. ‘쟤가 커서 대체 뭐가 될까’ 고민하던 어머니의 뇌리를 스친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초등학교 때 월드비전 합창단에 들어갔어요. 어머니께서 ‘그냥 두면 망나니가 되겠다’ 싶으셨나 봐요. 그나마 제일 잘하던 노래를 시키신 거죠. 합창단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했어요. 그래서인지 학창시절 추억이 많이 없어요. 학교를 한 달씩 빠지기도 했거든요.”

그녀는 월드비전 합창단에 몸담으면서 자연스럽게 무대라는 공간에 익숙해졌다. 임강희는 “처음 무대에 설 땐 뮤지컬을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시의 추억을 묻자, 뉴욕시의 카네기홀에서 공연했던 기억을 꺼내놓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카네기홀 공연 때 ‘아리랑’을 불렀었어요. 고음으로 올라가는 파트가 있었는데, 정말 발끝부터 머리까지 소름이 쫙 끼쳤어요. 공연 끝나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타지에서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다가왔었죠.”

그녀의 첫 뮤지컬 경험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TV에 나온 뮤지컬의 한 장면을 보자마자 ‘뮤지컬을 해야겠다’는 감이 왔다. 무대가 자신의 운명임을 직감한 것이다. 

“어머니께 연극영화과를 가겠다고 설득했어요. 그땐 정말 맞아죽을 뻔 했어요.(웃음). 결국 성악과를 갔는데, 안되겠더라고요. 몰래 재즈학원을 다녔어요. 그렇게 뮤지컬 ‘베르테르’를 통해 첫 데뷔를 하게 됐어요.”

신기한 것은, 임강희의 하나뿐인 동생 임화영도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임화영은 서울예술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연극 ‘광해’, ‘오월엔 결혼할거야’ 등에 출연했다. CF모델, TV 드라마의 단역으로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현재는 김기덕 감독의 후속작 ‘일대일’에 출연을 확정지은 상태다. 자매의 예술적 감각에는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집안에 예술을 하는 분은 없어요. 대신 아버지가 끼가 굉장히 많으셨어요. 건반, 색소폰, 드럼, 기타를 다 하셨거든요. 어머니는 노래를 정말 못하세요. 음치 수준인데, 외가 쪽이 다 그래요.(웃음) 그래서 저 태어날 때 엄청 기도하셨대요. 제발 노래 잘 하게 해달라고요. 그것 때문에 전축도 사셨어요. 그래서인지 제 어릴 적 사진엔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있는 사진들이 많아요.”

동생과의 관계를 묻자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애인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유를 물으니 “정말 친해요. 그래서 서로에게 배우로서 도움을 준다기보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해요. 스트레스 받으면 전화해서 ‘같이 한 잔하자’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동생이에요”라고 전했다.

데뷔작 뮤지컬 ‘베르테르’와 나 자신을 깬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
너무나 사랑했던 뮤지컬 ‘인당수 사랑가’의 춘향

그녀의 데뷔작은 ‘베르테르’다. 연출가 조광화, 배우 엄기준, 김다현, 김소현, 조정은 등 내로라하는 창작진이 함께한 무대였다. 첫 데뷔 무대의 감회도 남다르다. 당시 조광화 연출은 앙상블들 모두에게 하나하나 스토리를 만들어 줬고, 그녀는 연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공연까지 정말 ‘죽을 듯이 했다’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첫 작품 운이 좋았어요. 주인공을 받쳐주는 ‘그림’ 역할만 했다면 재미를 못 붙였을 것 같아요. 앙상블이지만 작은 역할에도 이야기가 있으니까 정말 재밌더라고요.”

임강희는 첫 작품 이후 잠시 서울예술단 생활을 했다. 그 무렵, 배우 생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앞으로 이 일을 계속 해야 할까’에 대한 의구심이 든 것이다. 그때 임강희를 잡아준 것이 바로 뮤지컬 ‘미스터마우스’다. 예쁜 역할을 주로 맡았던 그녀에게 연기에 대한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스승 같은 작품이었다.

“그전에는 공주 같은 역할을 많이 했었어요. 예쁘게 입고, 예쁘게 노래해야 하고. 예쁜 척을 하는 게 싫었어요. 그 즈음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를 했어요. 정말 많이 깨졌어요. 연기의 ‘연’자로 모를 때였거든요.”

처음으로 상황극을 해본 것도 그때였다. 임강희는 당시에 대해 “정말 당황했다”는 말로 축약했다. 그녀가 앞으로 나서자 연출자는 ‘역할로서 앞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라’고 주문했다. 낯선 상황에 당황했지만 천천히 설득에 나섰다. 창작진은 쉽게 져주지 않았고, 그녀의 입은 자꾸만 머뭇거렸다. 그때였다.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2시간을 울었어요.(웃음) 힘들더라고요. 다행히 같이 호흡을 맞추던 (서)범석 오빠가 많이 알려주셔서 계속할 수 있었어요. 뮤지컬 ‘미스터마우스’를 하면서 연기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직접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법을 많이 배웠죠. 그 이후부터 작품 선택을 할 때도 드라마를 많이 보게 된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녀가 이제껏 출연한 작품 중 가장 사랑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임강희의 입에서 단박에 뮤지컬 ‘인당수 사랑가’의 ‘춘향이’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너무 사랑했다”는 말로 인물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춘향’이라는 인물에 너무 빠져 살았었어요. 연습실에도 툭 건드리면 눈물을 후두둑 흘릴 정도로요. ‘춘향이 병’에 걸렸었죠.(웃음) 이입을 심하게 해서 힘들었어요. 동숭아트센터에서 뮤지컬 ‘인당수 사랑가’를 할 땐 원 캐스팅이어서 정신적으로 정말….”

임강희는 역할에 깊이 매료되는 편이다. 무엇이든 ‘올인’하는 탓에 가끔은 연기해야 할 캐릭터가 버거울 때도 있다. 그녀는 “제가 너무 많이 빠져있을 땐 건져줘야 해요. 아니면 심하게 빠져들거든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무엇이든 올인하는 성격이에요. 뮤지컬 ‘인당수 사랑가’ 속 춘향이는 저와 정말 닮았어요. 사랑의 방법도요. 극중 그런 대사가 있어요. ‘한 번 마음 열고 사랑했는데, 그 마음 어떻게 닫아요.’ 처음 그 대사를 봤을 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무대 위의 삶 “진짜로 느꼈을 때의 희열, 엄청나다”

임강희가 느끼는 무대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녀는 “무대는 그런 힘이 있어요”라는 말로 운을 뗐다. “연습과정은 정말 힘들지만, 무대를 ‘진짜’로 느꼈을 때 희열은 엄청나요. 아무나 느낄 수 없는 거거든요. 그 감정을 무대에서 단 한번이라도 느껴본다면 다행인 것 같아요.”

그녀에게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냐고 묻자 ‘연극’이라는 짤막한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대답의 기저엔 ‘연기에 대한 갈증’이 느껴졌다. 임강희는 “고전을 해보고 싶어요. 자유분방하면서도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역할이요. 선생님들이 많이 계신 작품도 좋아요. 사실 많이 깨지긴 하지만 정말 많이 배우거든요. 예전엔 잘하는 것만 계속 했었어요. 결국엔 발전이 없더라고요. 지금은 못하는 것에 도전하는 편이에요”라고 설명했다.

임강희의 무대 위 삶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친한 사람들도 여럿 있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배우들도 많다. 하지만 연기와 인생에 대해 깨달음을 준 이들은 많지 않다. 그녀는 배우 인생에 자극을 준 이들로 강신일과 조정은을 꼽았다.

“뮤지컬 ‘남한산성’ 때 강신일 선생님과 함께 무대에 오른 적이 있어요. 불러야 하는 노래가 있으셨는데, 정말 노래 연습을 쉬지 않고 계속 하시더라고요. 존경스러웠어요. 피아노 칠 수 있는 친구만 있으면 반주에 맞춰서 계속 연습하시고요. (조)정은 언니도 멋있어요. 서울예술단 생활을 하며 만났는데, ‘정말 어떻게 저렇게 끈질기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노래가 안 되면 끝까지 연습실에 남아서 계속 연습을 해요. 솔직히 잘하는 배우는 많잖아요. 정은 언니에게서는 끈질김에서 나오는 깊음이 있어요. 그 긴 시간동안 노력한 것은 절대 배신하지 않거든요.”

‘노력’은 임강희를 수식하는 또 다른 단어다. 힘들더라도 ‘배울 수 있는 작품’을 늘 찾아다니는 탓에 한 작품을 고르더라도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 “드라마를 많이 봐요. 그 다음으론 잘할 수 있는 작품 말고 배울 수 있는 작품인가를 보죠. 그래서 선배님들이 많은 공연을 좋아해요. 겉은 무섭지만 속정이 깊으신 경우가 많아요”라며 웃었다.

무대에 한해서 그녀는 고지식하다. 무대를 즐겨야 하는 건 맞지만, 절대로 ‘무대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뚝심은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 땀흘리는 열정에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이라고 말했다.

“전 아직도 무대가 무서워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정말 치열하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무대에서 지켜야 할 것들에는 무척 고지식한 것 같아요. 무대에선 장난치려 하지 않고요. 되든 안 되든 진심으로 모든 것을 쏟으려고 해요.”

뮤지컬 ‘인당수 사랑가’를 같이 했던 최성신 연출가는 임강희에게 이런 말을 했다. “강희는 그냥 간다”고. 소박한 칭찬이었지만 임강희에겐 큰 힘이 되어준 한 마디였다. 그녀는 “배우들 중에 텍스트를 보고 이해가 안가서 못 움직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전 그냥 해봐요. 지문에서 ‘운다’고 하면 울어 봐요. 그러면서 찾아지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있어요. 전 그런 감정들에 감각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전 편지 쓰는 걸 좋아해요. 문자도 장문으로 남기고요.(웃음) 이해 못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전 그렇게 대답해요.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글로 쓰는 거라고.”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 지 물었다. 임강희는 “믿고 보는 배우가 중요한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배우는 저 배우만의 색으로 뭔가를 보여줄 거란 믿음이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저 배우라면 저걸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해지고, 저 배우가 표현하면 뭔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는 배우. 그런 기대감을 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자투리 TALK

- 뮤지컬 넘버 중에 부르고 싶은 넘버는?

뮤지컬 ‘지캘앤하이드’에서 루시가 부르는 ‘A new life’요. 이 노래를 굉장히 좋아해요. 전 이 작품 속에서 루시가 굉장히 약한 여자라고 생각하거든요. 반면 지킬의 약혼녀 엠마는 굉장히 독하고 강한 여성이라고 생각하고요. (김)선영 언니의 루시를 보면서 참 ‘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 평상시 연습이나 체력단련은 어떻게 하는지.

체력 단련 겸 정신 수양으로 필라테스를 해요. 집중력, 근력을 높일 수 있는 운동을 하는 편이죠. 노래를 배워보려고 여러 차례 시도를 했는데, 아직까지는 제게 맞는 선생님을 못 만난 것 같아요. 뮤지컬 ‘글루미데이’를 하면서 진성을 쓰게 됐는데, 다시 제대로 배워서 더 많은 역할들을 해보고 싶어요.

- 가장 기억에 남는 팬이 있다면.

늘 곁에 있어주는 팬들이 있어요. 지금은 팬이 아니라 거의 친구예요. 제가 못하면 ‘언니, 왜 이래요’ 할 정도로 모든 걸 오픈했죠.(웃음) 이젠 결혼해서 아기를 낳은 친구도 있는데, 가족 같아요. 제가 잘하든 못하든 늘 응원해주니까 정말 고마워요.

 

정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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