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수하고 생기 넘치는 말들이 가득한 어느 마구간, 늙고 힘없는 말 하나가 연신 가려운 몸을 긁으며 조롱을 받고 있다. 오직 그와 사랑을 나눴던 암말만이 그를 알아볼 뿐이다. 노마(老馬)는 애송이들의 치기에 화를 내고 발을 구르는 것 대신, 자신도 한때는 저희처럼 멋지고 늠름한 준마였음을 이야기하며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홀스또메르’는 얼룩빼기(잡종)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서 버림받는다. 그는 순수한 혈통만을 보전하기 위한 인간의 욕심으로 거세당한다. 암말 ‘바조쁘리하’와 행복한 사랑을 꿈꾸었으나 그 기회마저도 빼앗겨 버린다. 자유를 박탈당한 채 노예처럼 살던 ‘홀스또메르’에게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찾아온다. 공작 ‘세르홉스끼’가 그를 데려가 경주마로 변신시킨 것이다. ‘홀스또메르’는 남다른 기량을 자랑하며 경주마로서 최고의 삶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세르홉스끼’의 연인이 경마장에서 만난 장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가는 일이 발생하고, ‘홀스또메르’는 그들을 추격하다가 불구가 된다. 경주마로서의 가치를 잃은 ‘홀스또메르’는 다시 버림받고 마(馬)시장에 팔린다.

‘홀스또메르’가 이곳저곳 팔려다니며 마지막 삶을 보내는 곳은 바로 자신이 태어난 마구간이다. 얼룩빼기로 태어나 처음 인간의 천대를 받았던 이곳에서, 그는 젊은 말들에게 또 한 번 모욕을 당한다. ‘홀스또메르’의 이야기가 끝나자, 익숙한 모습의 늙은 사내가 그의 눈에 비친다. 분노와 방황 끝에 가산을 탕진하고 알코올중독에 걸린 ‘세르홉스끼’와 다시 마주한 것이다.

늙음: 중후하거나, 추하거나, 가련하거나

음악극 ‘홀스또메르’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어느 말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다. 러시아 공훈예술가인 마르크 로조프스키가 극작해 1975년 러시아(당시 소련) 레닌그라드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했다. 국내에서는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작품상과 연출상(1997년), 인기상(2000년)을 수상했다. 이번 공연은 극단 광대무변(유시어터)의 손길로 더욱 새로워진다.

작품은 인간이 소유하고 버리는 ‘말’의 시각으로 삶에 대한 통찰과 유의미한 질문을 던진다. 이를 크게 관통하는 것은 음악이다. 대부분의 뮤지컬은 각 넘버와 서사가 유기적이면서도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음악극’의 옷을 입은 ‘홀스또메르’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흐르며 호흡을 같이한다. 덕분에 철학적이고 무거운 주제가 한껏 유연해지고, 4인조의 깔끔한 악기 구성으로 중점이 되는 포인트를 촘촘하게 좁혔다.

배우들은 순수함과 노련함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연기폭을 선보였다. 유인촌(‘홀스또메르’ 役), 김명수(‘세르홉스끼’ 役), 김선경(바조쁘리하/마찌에/마리 役) 등의 주연 배우들은 수십 년을 다진 관록으로 단단한 토양을 이루고 있었다. 지대한, 위훈, 김기분 등의 조연 배우들과 12명의 코러스 역시 흔들리지 않는 기본기로 탁월한 몸놀림을 자랑했다.

노오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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