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네 남자가 마이크를 잡는다. 스피커를 울리는 목소리는 생전 들어보지 못한 음성이다. 노랫말은 더욱 놀랍다. ‘Sherry’, ‘Baby’, ‘Come out tonight’ 등 해석 없이도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은 말들이 반복된다. 한국말로 바꾸면 샤이니의 ‘누난 너무 예뻐’ 보다 더 솔직하고 앳된 노래일 것 같다.

이 노래는 1960년대를 풍미한 원조 아이돌 ‘포시즌스’(Four Seasons)의 데뷔곡 ‘Sherry’다. 당시 세계 음악의 흐름을 주도하던 비틀스, 롤링 스톤즈 사이로 끼어든 맹랑한 소년들이 다시 객석을 달군다. ‘포시즌스’의 일대기를 다룬 오리지널 팀 내한 뮤지컬 ‘저지보이스’가 한국에서 첫걸음을 떼었다.

인간극장, 성공시대보다 더 ‘진짜’ 같은 이야기

전무후무한 목소리를 가진 ‘프랭키 밸리’는 뉴저지의 반항아 ‘토미 드비토’와 ‘닉 매시’의 눈에 들어 밴드를 하게 된다. ‘토미 드비토’와 ‘닉 매시’가 번갈아 감옥에 들락거리는 동안, 밴드는 변변한 이름도 없이 이곳저곳을 헤맨다. 천재 작곡가 ‘밥 고디오’가 네 번째 멤버로 합류하면서 밴드는 ‘포시즌스’라는 이름으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성공가도를 달리던 ‘포시즌스’는 채무 문제와 멤버들간의 불화로 삐걱대고, 결국 뿔뿔이 흩어져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뒷골목의 문제아들이 세계를 뒤흔드는 스타가 될 확률은 얼마일까. 또 이들이 평생을 함께할 확률은 몇이나 될까. 복권 당첨자를 발표할 때처럼 ‘짜잔’ 하고 내놓을 수 있는 수치는 아니지만, 굳이 적은 쪽을 꼽자면 후자일 것이다. 뮤지컬 ‘저지보이스’의 1막보다 2막이 더 ‘볼만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성공의 씨앗은 누구에게나 있다. 꿈, 재능, 사업수완, 든든한 파트너와 지원군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차가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되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성공에 정해진 주인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의 앞이라면 다르다. 계절이 옷을 갈아입듯, 측량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도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 뮤지컬 ‘저지보이스’에서 ‘포시즌스’라는 이름만큼 안타까운 복선은 없다.

뮤지컬 ‘저지보이스’는 드라마의 기승전결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테마로 내놓는다. 뻔한 구성이지만 내리막은 언제나 정상에서 시작한다는 서글픈 명제를 공고히 하는 설정이다. 이를 반영하는 것은 ‘프랭키 밸리’의 첫 솔로 무대 ‘Can't Take My Eyes Off You’다. 이 노래는 역설적이게도 공연장에 울려 퍼지는 수많은 히트곡들 중에서 가장 쓸쓸하게 들린다. 무대에는 귀가 번쩍할 만큼 유명한 멜로디에 화려한 브라스 세션이 진을 치고 있지만, 정작 ‘프랭키 밸리’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

억지 감동, 의미 없는 Replay는 가라!

작품은 아티스트의 히트곡을 기반으로 드라마를 설계하는 다른 주크박스 뮤지컬과 달리 독립적인 스토리를 가진다. 보잘것없는 네 남자의 성공기가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토미 드비토’, ‘밥 고디오’, ‘닉 매시’, ‘프랭키 밸리’의 순서로 해설의 바통이 이어지는 것도 다각적 진실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네 명의 주인공은 추억을 독점하려 들지 않는다. 덕분에 성공 뒤 가려진 눈물과 갈등, 이들이 하나의 길을 걷기 위해 버려야 했던 모든 것들이 아련한 잔상으로 남는다.

뮤지컬 ‘저지보이스’는 모든 면에서 재현이 아닌 창조의 방법을 선택한다. 배우들은 단순히 전설의 팝스타 ‘포시즌스’를 모방하는 것을 넘어 각자의 무기로 캐릭터가 가진 당위성을 호소한다. 배우가 악기를 핸드싱크하면서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는 연주의 리얼리티를 살리고자 연기의 본질을 놓쳐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뮤지컬 ‘저지보이스’는 지엽적인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리듬과 안무, 액팅의 굵직한 골격만 맞춰 배우의 자율성을 한층 강화한다.

‘프랭키 밸리’로 분한 그랜트 앨미럴은 3옥타브 반을 넘나드는 섬세한 고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가성을 소화해낸다. ‘토미 드비토’ 역의 대니얼 부이는 마음보다 몸이 앞서는 거친 ‘상남자’의 매력을 밉지 않게 드러낸다. ‘닉 매시’ 역을 맡은 임마누엘 커티스는 베이스기타를 닮은 중후한 음성으로 ‘포시즌스’의 무게 중심을 책임진다. ‘밥 고디오’ 역의 케네스 메이어는 마치 스포츠 중계를 하는듯한 뉘앙스로 현장감을 살린다.

뮤지컬 ‘저지보이스’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세트 드럼이다. 밴드 사운드에서 가장 중요한 드럼 파트가 배우의 동선에 맞춰 움직인다. 이는 핸드싱크가 주는 섭섭함을 단번에 해소하고 사운드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한다. ‘Sherry’, ‘Who Loves You’, ‘Oh! What a Night’ 등 주요 넘버들도 드럼 스틱을 지휘봉 삼아 춤춘다.

무대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지만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이 없다는 느낌이다. ‘포시즌스’의 음악방송 녹화와 동시에 카메라에 비친 영상을 내보낸 것이나, 배우들의 등을 돌려 무대 뒷모습을 연출한 장면을 제외하고는 시선을 모으기 힘들다. 일러스트도 노래가 바뀔 때마다 자주 전환돼 산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노오란 기자 newstage@hanmail.net

사진_마스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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