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의 대명사 ‘돈키호테’는 세기의 ‘불온 인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을 직시하는 자는 무죄요, 이상을 좇는 자는 유죄다. 허나 애초부터 꿈에는 정해진 주인도 없고 결말도 없다. 꿈꾸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숭고하며 고귀하다.
  
사람들이 ‘먹고사니즘’(먹고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세태를 풍자한 신조어)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꿈보다 빵이 먼저다. 하지만 어느 성인(聖人)의 명언처럼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는 없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꿈, 빵, 삶의 인과 관계를 그럴듯하게 해설하는 작품은 아니다. 스러진 영웅의 식어버린 손에 다시 검을 쥐여 주며 ‘꿈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이야기다.

운명 앞에 당당한 자는 앞으로 나오라

배우이자 작가인 ‘세르반테스’는 자신이 쓴 희곡으로 인해 신성모독죄로 감옥에 끌려온다. 감옥 안에 있던 죄수들은 그를 둘러싸고 거친 신고식을 치르려 한다. ‘세르반테스’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그가 집필한 희곡을 함께 공연해보자며 죄수들의 관심을 돌린다. 그의 대본 속에는 아직 결말을 정하지 못한 ‘짧고 굵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수백 년 전 없어진 기사(騎士)를 흠모하다 못해 자신이 기사라고 믿고 있는 ‘알론조’(돈키호테)가 그 주인공이다. 

자칭 ‘라만차의 기사’인 ‘알론조’(돈키호테)는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다. 그는 하인 ‘산쵸’와 함께 시골의 누추한 여관에 몸을 의탁하게 된다. 모두가 그를 미쳤다 해도 ‘알론조’는 개의치 않는다. 창녀인 ‘알돈자’를 고결한 레이디 ‘둘시네아’로 믿을 정도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환상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세르반테스’도 이야기를 완성하지 못한 채 종교 재판의 희생양이 될 위기에 처한다.

자칭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는 사지(死地)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거침이 없다. 고상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그의 머릿속에는 기사, 기사, 그리고 기사로만 채워져 있다. ‘돈키호테’에게 기사도(騎士道)는 사회 지도층으로서 한량없는 관용을 베풀 줄 아는 동경의 대상이다. 부조리를 보면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돈키호테’를 두고 ‘이상은 이상일 뿐’이라며 선을 그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수많은 ‘혹자들’ 속에서 ‘돈키호테’가 분연히 빛나는 이유다.

‘돈키호테’는 세월의 끝자락을 놓지 못해 낑낑대는 노익장이 아니다. 그는 꿈을 전염시키는 묘한 매력의 사나이다. 그의 곁을 지키는 ‘산쵸’조차 ‘돈키호테’를 기사라고 믿는다. ‘돈키호테’의 ‘둘시네아’ 타령에 몸서리치던 ‘알돈자’도 그를 통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세르반테스’ 역시 또 하나의 ‘돈키호테’로 분해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앞에 당당히 마주 선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원작 소설과 다르게 극중극 형식을 취한다. 하나의 사건을 ‘기-승-전-결’로 다루기보다 과거, 현실, 이상을 적절히 섞어 놓는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도 되었다가 ‘알론조’가 되기도 한다. 죄수들은 ‘알돈자’로, 혹은 ‘돈키호테’가 묵는 여관 주인으로 분한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가 소설 ‘돈키호테’의 서사를 그대로 따르지 않은 것은 무대예술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을 공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깊게, 더 깊게…배우들 호연 돋보여
다소 배려가 부족했던 음악과 연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돈키호테’의 원맨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알론조’를 연기한 조승우는 캐릭터에 밀착해 깊은 내면 연기를 선보였다. 완전히 인물 속으로 들어가 관객에게 ‘환상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알돈자’를 맡은 김선영은 억척스럽게, 때론 상처 입은 작은 새처럼 감정의 증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산쵸’ 역의 이훈진은 다채로운 목소리 톤으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도지사’(죄수들의 우두머리)와 ‘여관 주인’으로 분한 서영주는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반전 매력 가득한 연기를 선보였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뛰어난 드라마와 캐릭터를 구축했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남겼다. 뮤지컬에서 음악은 또 하나의 대사로서 공연을 이끌어가는 요소다. 작품 고유의 분위기를 하나의 음악적 틀에 맞추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큰 틀을 맞추고 나면 드라마의 호흡에 맞게 다양한 변신을 꾀할 필요가 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음악은 스페인 뮤지컬이라는 특성을 감안하고서라도 라틴(스페인) 계열의 리듬과 사운드로만 반복돼 지루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에서 관객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연출 기법이 사용된 것도 문제였다. 작품에는 ‘돈키호테’의 조카사위가 될 ‘까라스코’가 그를 깨우치기 위해 목소리를 변조하고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기계적인 뉘앙스가 풍기는 음성 변조 효과는 숨죽인 객석의 집중력을 흩뜨렸다. 인위적인 음성 변조보다 반사 효과를 주는 이펙터(에코, 리버브 등)가 더 자연스러웠을 것 같은 의문이 남았다.

이 장면 바로 뒤에는 극중 ‘돈키호테’가 수많은 거울에 싸여 자신의 진짜 모습을 인지하는 명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거울이 조명을 그대로 반사해 객석을 비춘 탓에 오히려 시야에 방해가 됐다. 이러한 불편함조차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가 던지는 의도에 포함될 수는 있지만 능숙한 기술이 동원됐다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노오란 기자_사진 박민희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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