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가 아니라 ‘유머’다. ‘반주’가 아니라 ‘연주’다. ‘벽을 뚫는 남자’는 한두 시간 웃고 마는 그저 그런 뮤지컬이 아니다. 공연에 앞서 관객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편견을 유쾌하게 깨 놓는 수작(秀作)이다.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 속에는 그 제목만큼이나 놀라운 판타지가 숨어 있다. 원제보다 더 신기한 ‘벽뚫남’이라는 별명으로 국내 뮤지컬 팬들의 마음을 훔쳐낼 만하다. 드라마, 음악, 무대, 연기 등 어느 것 하나도 모자람이 없다. 벽을 뚫는 남자, 그리고 벽에 갇혀버린 남자 ‘듀티율’은 관객의 마음에 숨어들어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아련한 여운을 남긴다.

진짜 희극은 ‘Humor’로부터,
진짜 명작은 ‘Humanism’에서 나온다

전쟁이 막 끝난 프랑스, 지겹도록 평범한 우체국 공무원 ‘듀티율’은 낭만의 대명사인 몽마르트르 언덕에 살고 있다. 어느 날 그에게는 벽을 뚫고 다니는 기괴한 능력이 생긴다. 대부분의 장삼이사(張三李四)가 그렇듯, 보통 남자 ‘듀티율’도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평범한 소시민으로 돌아가고 싶은 ‘용수철 본능’의 소유자다. 하지만 그는 약자를 더욱 약하게 하는 부조리에 맞서 당당히 ‘벽을 뚫는 남자’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듀티율’은 벽을 뚫고 보석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온갖 권위로 무장한 관료들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영웅이 된다.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는 직설과 은유 사이의 줄타기가 뛰어난 작품이다. 작품은 ‘벽을 뚫고 영웅이 된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의 이면에 당시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는 암울한 사회에서 ‘듀티율’ 같은 존재가 더 빛날 수 있는 필연적 요소이기도 하다.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의 프랑스 사회를 가감 없이 그려낸다. 무대에는 다양한 모습의 시민들이 등장한다. 전쟁 때는 뭇 남성들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았지만 지금은 야채나 팔고 있는 매춘부, 관료제의 매너리즘에 빠진 공무원들, 낭만적인 몽마르트르의 뒷모습을 알고 있는 화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검사 등이 그들이다. 인물들은 가벼운 대화에서도 ‘전쟁’, ‘권력’ 등의 키워드를 이용해 풍자를 일삼는다.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는 1997년 프랑스의 토니상이라고 불리는 몰리에르상에서 최우수뮤지컬상을 받았다. 작품이 이러한 쾌거를 달성한 것은 몰리에르 식(式) 유머를 제대로 녹여낸 것과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 대표 극작가 몰리에르는 근대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위인이다. 그는 연극 ‘수전노’, ‘평민 귀족’ 등에서 기득권에 당하기만 하는 서민들의 카운터펀치를 호쾌하게 그려냈다.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가 박장대소를 유도하는 코미디 대신 살가운 유머를 선택한 것도 같은 이치다.

‘벽뚫남’에는 ‘상상력’이 들어갈 자리가 있다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의 무대는 다분히 회화적이다. 작품은 ‘듀티율’의 집, 보석가게, 빵집 등으로 가득 차 있어 좁아 보일 수 있는 세트를 원근감 있게 배치했다. ‘듀티율’이 뚫고 다니는 벽은 지퍼나 샤막(얼기설기 짠 직물로 만든 막, 조도에 따라 투명한 효과를 줌)으로 처리됐다. 완벽한 눈속임은 불가능하지만 기술보다 관객들의 믿음을 전제로 한 무대디자인이다. 무대는 전반적으로 ‘작위’를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물리’를 살려냈다. 관객에게 친절한 무대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은 대사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공연 내내 노래로만 흘러가는 송스루 뮤지컬이다. 송스루 뮤지컬은 대사를 통한 설명적 요소가 없어 자칫 관객들이 집중력을 잃을 수 있다. 이러한 문제가 2막에서 다소 드러나기는 하지만 훌륭한 음악과 탄탄한 구성으로 위험을 덜었다.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의 음악은 프랑스 재즈의 거장 미셸 르그랑이 맡았다. 그는 재즈 특유의 화성과 엇박자 대신 정박자와 저음역대가 돋보이는 안정감을 선택했다. 이는 드라마 특유의 유쾌한 분위기가 과잉돼 가벼워지는 것을 막고 작품의 구심점을 잡았다.

연주팀은 단 4명이지만 20여 가지의 악기를 사용해 오케스트라 못지않은 사운드를 구현한다. 악기가 가진 저마다의 개성은 인물의 성격에 그대로 녹아든다. 부정적 인물인 ‘검사’나 ‘우체국 부장’이 등장할 때는 스네어 드럼과 중후한 음색의 관악기로 긴장감을 준다. ‘듀티율’을 비롯한 긍정적인 인물들의 테마는 맑은 피아노 소리와 비브라폰, 차임 등의 퍼커션으로 익살스러움을 살린다.

배우들은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생기발랄한 연기를 펼쳤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듀티율’로 분한 마이클 리는 그간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등에서 보여준 무게감을 덜고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듀블’, ‘변호사’ 등으로 감초 역할을 맡은 고창석은 비주얼에서부터 남다른 아우라가 터져 나왔다. 그의 풍채와 코믹한 표정 연기의 조화는 작품의 해학성을 한껏 끌어올렸다.

‘화가’ 역의 강연종은 든든한 버팀목 같은 가창력으로 보이지 않는 화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야채장수’, ‘매춘부’ 역을 맡은 이정화는 자조(自嘲)와 ‘셀프 디스’를 넘나드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그는 ‘느낌 아니까’라는 짧고 강렬한 대사로 객석을 들썩이게 했다. 반면 ‘이사벨’ 역의 최수진과 ‘신문팔이’로 분한 손승원의 연기는 다소 조화롭지 못한 느낌이었다. 다른 인물과는 다르게 캐릭터가 밋밋하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노오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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