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저만치 걸어온다. ‘죽음’은 내밀하게 다가와 폐부를 찌르고, 재빠르게 달아나 손끝에서 스친다. 죽음은 ‘나르키소스’의 전설이 깃든 ‘수선화’처럼 위태로운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 아래의 얼굴들은 죽음의 퍼런 서슬에 억눌려 있다. 죽음은 당장 손을 뻗어 낚아채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로 발아래 놓인 인간들의 발버둥을 관조한다. 국립발레단의 ‘발레 롤랑프티’는 이토록 매혹적인 ‘죽음과 대상’의 관계를 파격적이고 세련된 춤언어로 풀어낸 작품이다.

치명적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일까. ‘발레 롤랑프티’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던 발레계의 거장 ‘롤랑프티’가 국립발레단에 직접 전한 작품이다. ‘아를르의 여인’, ‘젊은이와 죽음’, ‘카르멘’ 총 3色 안무로 구성된 무대는 모두 ‘죽음’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관통한다. 시대의 흐름에도 여전히 관능적이고 세련된 ‘롤랑프티’의 안무작 세 편을 10월 1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만났다.

감각을 일깨우는 ‘롤랑프티’의 안무

‘발레 롤랑프티’는 천재 안무가 ‘롤랑프티’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서사적 구조, 판타지와 리얼리즘의 경계를 오가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안무가의 탁월한 재량을 보여준다.

그의 안무작은 관객의 감각을 거침없이 일깨운다. 안무 외에도 음악, 무대, 연출력이 동시에 빛을 발한다. ‘발레’를 종합 예술로 끌어올렸다 할 만하다. 섬세하고 상징적인 무대는 연극적이다. 무대 세트는 ‘춤의 배경’을 넘어서 또 하나의 상징적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의 안무는 직설과 은유를 오가며 ‘은밀하고 담대하게’ 관객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고, 춤은 시작된 순간에서 끝까지 멎지 않는다. 죽음의 서사가 예정된 비극을 향해 턱 끝 까지 차오르면, 거대한 죽음의 실체가 무대를 뒤덮는다.

1940~70년대 사이에 만들어진 세 개의 작품은 지금 봐도 여전히 도발적이며 세련됐다.  ‘젊은이와 죽음’(1946년)과 삼 년 뒤에 만든 ‘카르멘’(1949년)은 젊은이의 피 끓는 상상력이 넘실대고, 1974년 만든 ‘아를르의 여인’은 한층 깊어진 ‘롤랑프티’의 안무 세계가 엿보인다. 한 번의 만남으로도 거장의 성장과 절정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발레 롤랑프티’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섬세한 비극, ‘아를르의 여인’

‘아를르의 여인’은 ‘알퐁스 도데’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작품은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아를르의 여인’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프레데리’와 그를 사랑하는 ‘비베트’의 결혼식을 배경으로 한다. 서로 다른 방향을 좇는 두 사람의 춤은 그들을 축하하는 군무와 뒤섞여 ‘어긋난 사랑’의 비극과 아이러니를 그린다.

‘아를르의 여인’은 한 폭의 유화를 연상하게 한다. 고흐의 그림을 떠오르게 하는 작화막 위로 프로방스 전통옷을 입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유려하게 이어진다. ‘롤랑프티’가 약 50세 즈음에 만든 이 작품은 절제된 비극을 밀도 있게 조리한다. 뒤이어 등장하는 두 작품은 젊은 안무가 ‘롤랑프티’가 상상한 죽음을 솟구침과 침전의 움직임으로 강렬하게 구현하지만, ‘아를르의 여인’은 죽음을 서정적이면서도 한층 더 농도 짙게 표현한다.

드라마적으로 높은 완성도는 감동을 배가시킨다. ‘아를르의 여인’은 두 사람의 결혼식으로 시작해 ‘프레데리’가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마지막 장면까지 인물의 내면을 정성스럽고 세밀하게 쌓아올린다. 감정의 절정에서 거침없이 죽음으로 자신을 던지는 ‘프레데리’의 모습은 오랜 잔상을 남긴다. 거장의 숙성된 노련미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지고지순한 비극은 무용수들의 연기로 입체감을 입었다. ‘프레데리’ 역의 이동훈은 날로 무르익어가는 연기력을 뽐냈다. 닿을 수 없는 사랑의 고뇌와 ‘비베트’의 사랑을 알면서도 외면할 수밖에 없는 ‘프레데리’를 섬세한 표현력으로 묘사했다. ‘비베트’ 역의 이은원은 발랄한 발놀림 끝에 묻어나오는 사랑스러움으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프레데리’를 향한 끝없는 마음을 담은 연기는 관객들의 충분한 박수를 받을 만했다.
 

가장 매혹적인 죽음, ‘젊은이와 죽음’

‘젊은이와 죽음’은 청바지를 걸친 한 청년이 침대 위에 누워 담배를 빼어 무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대는 옛 무성영화처럼 잿빛으로 점철돼 있다. 청년은 허무한 연기처럼 사그라들 듯 위태하다. 그때 그의 공간에 침입한 노란 원피스의 여인은 치명적인 마력으로 청년을 유혹하고 굴복시킨다. 작품은 무채색에 유일하게 색을 입은 이 노란 원피스의 여인처럼 가장 원색적이고 파괴적인 죽음의 매혹을 담는다.

‘젊은이와 죽음’은 영화 ‘백야’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춤으로도 유명하다. 작품은 ‘롤랑프티’가 스물두 살에 만든 안무작으로, 세 작품 중 가장 선이 굵은 ‘죽음’의 비극적 정서를 품고 있다. 청년 ‘롤랑프티’가 상상한 ‘죽음’이 가장 격렬하게 타오르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은 노란 원피스의 여인을 통해 파괴적이지만 매혹적인 죽음의 형상을 창조해낸다. ‘팜프파탈과 죽음’에 등식을 세운 점이 흥미롭다. 바흐의 ‘파사칼리아’에서 우러나오는 장중함 위로는 젊음과 죽음, 성(性)에 억눌린 청년의 감정이 날뛴다. ‘롤랑프티’는 두 인물의 마찰로 빚어지는 파열음을 통해 청년이 분노하고, 상실하며 죽음에 복종하는 과정을 담는다.

김용걸은 불혹이라는 나이를 무색케 하는 힘과 스피드로 정확한 동작을 구사했다. 나이와 함께 농익은 그의 연기력은 청년의 광기와 억눌린 욕망을 폭발적으로 드러냈다. ‘팜므파탈’로 분한 유난희는 그녀의 필모그라피를 빛낼 또 하나의 작품을 만난 듯했다. 그녀는 성적 매력과 우아함을 동시에 갖춘 노란 원피스의 여인을 풍부한 표현력으로 연기했다.
 

관능적이고 유쾌한 ‘카르멘’

‘발레 롤랑프티’의 마지막을 장식한 ‘카르멘’은 비극에 온몸을 싣지 않는다. 오히려 재기발랄하다. 객석 여기저기에서도 웃음이 툭툭 튀어나온다. 안무는 진지함 속에 엿보이는 재치가 탁월하다. ‘카르멘’과 ‘호세’의 파드되는 직설적이면서 관능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적절한 표현력을 갖는다. 예로, ‘호세’와 ‘카르멘’의 침실 파드되에서는 ‘카르멘’이 한쪽 손가락을 입에 물고 춤을 춘다. 그들에게 벌어진 하룻밤의 짜릿함과 농염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동작이다. 작품 곳곳에 스민 유머러스함은 ‘죽음의 비장함’으로 가득 찼던 이전 무대에 떨고 있던 관객의 숨통을 틔워줬다.

무대 연출은 볼거리가 넘친다. ‘카르멘’의 백미 중 하나인 ‘의자 장면’은 ‘슬로우 모션’과 여러 소품을 활용해 다양한 동작과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무용수들은 직접 소리 내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기존 클래식 무대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한 광경이다. ‘카르멘’과 ‘호세’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두 사람의 다툼은 타악기만으로 구성된 음악 속에서 펼쳐진다. 조명은 무대 양 쪽 사이드에서 무용수를 비춰 무대 뒤로 긴 그림자를 여러 개 만들어낸다. 그림자는 겹치고 흩어지며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서스펜스의 극대화를 이끌어냈다.

김지영과 이영철은 경험자다운 관록을 자랑했다. 두 무용수는 모두 2010년 ‘롤랑프티의 밤’에서 동일한 역할을 맡은 바 있다. 두 주역무용수의 무대는 단단하고 틈이 없었다. ‘카르멘’ 역의 김지영은 사랑으로 울울창창 피어난 꽃이었다가도 길들지 않는 사나운 들짐승이 되는 집시 여인의 분방함을 터트렸다. 이영철의 ‘호세’는 옴므파탈의 전형을 보여줬다. ‘카르멘’을 갈구하는 남자의 진한 욕망부터 사랑에 무너지고 마는 순정 마초까지 섬세한 연기력으로 그려냈다.
 
 
 
 
정지혜 기자_사진 박민희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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