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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Flashback.22] 이제껏 없던 명성황후의 얼굴, 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상징과 이미지의 매력 돋보이는 세련된 작품

 

극장을 돌아 나오는 길에 뼈 마디마디 한(恨)이 서린다. 총명했던 열여섯 수줍은 소녀는 궁에 들어 국모라는 자리를 머리에 이었다. 호랑이 같은 시아버지와 나약한 남편, 그 사이에 놓인 어린 왕비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걸까. 모든 역사는 기록이기 이전에 개인의 이야기다. 서울예술단 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이하 잃어버린 얼굴)는 역사와 세간의 입방아 속에 묻혀버린 명성황후의 맨 얼굴을 찾는 작품이다.

가무극 ‘잃어버린 얼굴’은 사진 찍기를 즐겼던 고종과 달리 명성황후가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착안한다. 얼개도 독특하다. 작품은 명성황후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명성황후를 다룬 기존의 콘텐츠가 영웅적 생애를 다루었던 것과 사뭇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작품은 1897년 명성황후의 국상이 한참 지난 시점, 민영익이 휘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는 민영익은 휘와 함께 서로의 기억을 더듬어 간다. 휘는 어린 시절 명성황후와 악연을 맺은 인물이다. 휘의 어머니는 임오군란 당시 피난 온 왕비의 신분을 모르고 한 험담 때문에 죽음을 맞고, 정혼자 선화는 왕비를 따라 궁으로 들어간다. 휘는 왕실 사진사 덴신의 조수로 일하며 복수할 날을 기다린다. 한편, 왕비는 자신의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해 사진 박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몰아치는 열강의 거센 파도와 쇄국을 택한 시아버지, 스스로 서지 못했던 유약한 남편 사이에서 점점 고립돼 간다.

무대는 스토리텔러 민영익과 휘의 인도에 따라 과거와 현재, 사실과 비사실을 자유롭게 오간다. 사건도 순차적이지 않다. 서사 대신 장면을 선택한 작품은 사진처럼 이미지로 관객을 압도하고, 오랜 잔상을 남긴다.

작품은 역사적 평가가 극명한 ‘명성황후’를 소재로 삼지만 편벽하지 않는다. ‘명성황후’는 스스로 근대의 주체가 되려 했던 왕비이자 잔혹한 권력자, 사랑받지 못한 여인, 아이를 몇이나 가슴에 묻어야 했던 어머니 등 다양한 시각으로 묘사된다. 파가저택(破家瀦宅:죄인의 집을 헐어 버리고 물을 대어 못을 만들던 형벌)을 명하는 폐위된 여왕은 한파처럼 차갑지만, ‘싫단 말 말고, 가란 말 말고, 날 보아줘요’라고 말하는 여인은 비에 젖은 새처럼 가긍하다.

작품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자주 등장한다. 무대부터 대사, 인물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 모두 다각적이다. ‘얼굴’과 ‘사진’은 상징적 의미로서 인물들 사이에 존재한다. 명성황후가 사진을 찍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일본인 기구치는 ‘암살될까 두려워서’라고 말하고, 대원군은 ‘부끄러운 게 많아서’라고 말한다. 정작 명성황후는 ‘그 얼굴이 진짜 내 모습이 아닐까 두렵다’고 고백한다. ‘얼굴’이 그녀의 실체라면, 그 얼굴을 담는 ‘사진’은 그녀의 영혼을 담는 하나의 그릇인 셈이다.

무대도 마찬가지다. 무대는 ‘액자’라는 오브제를 통해 작품을 관통한다. 액자는 보는 각도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른 사물이다. 이 과학적 사실은 다양한 관점으로 명성황후의 얼굴을 녹여낸 작품의 맥락과 맞물리며 액자를 상징으로 바꾸어 놓는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대상이 달라질 수 있음을 피력한 것이다. 승강 무대도 인상적이다. 4단으로 나눠지는 무대 바닥은 단계별로 승강하며 풍성한 무대 이미지를 구현한다. 승강 무대는 장면 구성과 인물 관계, 이미지 연출에 효과적으로 활용돼 시각적인 즐거움도 더한다. 다만 앞좌석을 선택할 경우 시야에 방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인상적인 것은 명성황후와 선화의 관계다. 선화는 명성황후의 또 다른 자아로서 곳곳에 드러난다. 촌부의 삶이 소원이라 말하는 선화의 말간 얼굴은 궁에 시집간다며 환히 웃던 열여섯 소녀의 모습과 겹쳐진다. 두 사람의 대화에도 상징은 숨어있다. 거울을 앞에 둔 명성황후는 선화에게 자신의 얼굴이 보이느냐고 묻는다. 선화는 ‘아무리 숨기셔도 저는 아주 잘 보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선화를 명성황후의 또 다른 자아로서 치환한다면 대답의 의미는 색이 달라진다.

이번 작품을 연출한 이지나는 풍물, 무용, 뮤지컬 모두 소화 가능한 서울예술단의 장점을 십분 활용했다. 그녀는 ‘국상’, ‘새야 새야’, ‘갑신정변’, ‘굿’ 등의 장면에서 수준 높은 안무와 국악기의 타격감, 몽환적인 조명을 통해 역동적이고 시각적인 군무 장면을 빚어냈다. 전문적 역량을 가진 무용수의 몸놀림은 때론 열 마디 대사보다 더욱 강한 설득력을 이끌어냈다.

음악은 작품 전체의 묵직한 정서와 근대적 분위기를 모두 잡아냈다. 민찬홍 작곡가는 피아노, 현악기, 타악기를 모두 사용해 폭넓은 작곡 실력을 선보였다. 처연하게 떨어지는 클래식한 피아노 선율은 장중하고 신비로운 톤을 만들어냈고, 풍성한 현악기는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한국 전통 타악기 선율이 울려 퍼지는 ‘굿’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굿’의 무속적인 색채에 더해진 전통 타악기의 격렬한 울림은 관객의 긴장과 웅혼함을 정점까지 끌어올렸다.

 

차지연은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명성황후’를 만들어냈다. 한국적 정서를 담을 줄 아는 그녀의 목소리는 한(恨)으로 객석을 적셨다. 자신을 던져 연기하는 차지연의 모습은 새삼 걱정스러울 정도의 무서운 몰입도로 관객을 압도했다. ‘휘’ 역의 손승원은 작품의 큰 축을 맡아 당돌하게 역할을 소화했지만, 표현력과 가창력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고종’ 역의 박영수와 ‘흥선대원군’ 역의 금승훈은 ‘명성황후’를 압박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멋진 조화를 이뤘다. 특히, 박영수는 기존의 선한 이미지를 벗고, 퇴폐적이고 유약한 왕으로 성공적인 변신을 보여줬다. 김도빈은 젊은 혁명가 ‘김옥균’을 자신의 패기 넘치는 에너지로 풀어냈고, 서울예술단의 새로운 기대주로 떠오른 조풍래는 자칫 튈 수 있는 스토리텔러 역을 절제를 통해 넘치지 않게 그려냈다. 김건혜는 맑은 음색과 환한 미소로 작품의 중요 열쇠인 ‘선화’ 역을 객석에 비춰냈다.

작품은 짧은 제작 기간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무대를 구현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열된 사건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해 자연스러운 흐름을 잇지 못했다. 극중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축인 ‘휘’의 캐릭터의 매력도 다소 약하다. 가무극 ‘잃어버린 얼굴’은 아직 다부지진 않지만 단 한 번의 무대로 끝나기에는 아쉬운 작품이다. 정제의 시간을 거쳐 다시 관객의 곁에 돌아오길 기대해본다.

 

 

 

정지혜 기자_사진 박민희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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