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무단에 들어간 지 1년이 지났다. 선배 중에 한 분이 신입단원과 기존 단원들을 선발해서 워크숍 공연을 하기로 했다. 작품은 뮤지컬 ‘환타스틱스’, 우리말 제목은 ‘철부지들’이었다.

배우 구성은 원하는 사람들로 했다. 공연 장소는 ‘연습실’이고, 관객은 ‘가무단 단원’ 이었다. 하찮게 생각할 수도 있는 공연이었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멋지게 해보고 싶었다. 연습기간은 약 3개월 정도로 정했는데, 목숨을 걸고 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배역이 발표 되고, 내가 남자 주인공인 ‘마트’로 결정되었다. 하루 연습시간 목표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연습에 할애하기로 했다. 이 작품의 전체 연습시간이 하루 평균 6시간 정도였는데, 나는 매일 평균 17시간 정도 연습을 했다. 나름대로 연습량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단체 연습시간에는 항상 자신이 넘쳐 있었다. 그러나 매일 매일 연습시간 동안에 연출자에게 단 한 번의 칭찬도 받지 못하고 숱하게 많은 지적만 받았다.

“남경읍, 너 어디 학교 출신이야?”
“네, 드라마센터 출신입니다.” 그 당시 서울예대는 드라마센터로 불렸다.
“야! 연기를 왜 그따위로 해?”

다시 전체 연습시간 이외에 11시간의 개인 연습시간을 통해서 지적받은 부분을 연습했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연습시간에도 마찬가지로,
“야 임마! 말을 해 말을, 전설의 고향 하냐? 귀신 곡하냐?”
대사가 자연스럽지 못하면 연출자나 선배들이 주로 하는 말이다.

“죄송합니다.” 또 다시 지적받은 부분을 11시간 동안 스스로 연습했다. 그러나 다음 날 또다시,
“남경읍, 네 어머니 뭐하셔?”
“네, 생선장사 하십니다.”
“생선이나 팔아 임마, 네 까짓 게 무슨 배우를 한다고 그래. 배우 아무나 하는 줄 알아? ”
“죄송합니다.”

또 다시 반복된 연습을 했고, 다음날 가무단에 나가면 다른 배우들이 나오는 장면은 열심히 연출하던 선배님이, 내가 나오는 장면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고, 또다시 다른 배우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열심히 연출하다가 내가 나오면 똥 씹은 표정으로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거의 두 달 내내 그런 일이 반복되었으므로, 나는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러던 와중에 큰 변화가 하나 생겼다.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을 대관했던 어떤 단체가 대관을 취소하는 바람에 소극장이 며칠 동안 펑크가 나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었다.

그 당시 사무국의 사무장님과 가무단의 단장님이 절친한 사이였는데, 사석에서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소극장 펑크 얘기가 나왔고, 사무장님이 가무단 단원들의 워크숍 공연 준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렇다면 ‘철부지들’을 펑크난 기간에 가무단의 정기공연으로 올리자.”
졸지에 워크숍 공연이 정기공연으로 바뀌게 되었고, 약관의 나이인 나는 워크숍 공연 주인공에서 정기공연 주인공으로 바뀌게 되었다.

아무튼 자신감을 거의 상실한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지쳐 있었다. 연습 중에 유난히도 지적을 많이 받는 부분이 있었다. 대사를 하다가 노래로 연결되는 부분인데, 그 날도 그 부분에 이르자 무척 긴장을 해 결국 실신을 하고 말았다. 잠시 후에 눈을 떠 보니, 병원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영화화면처럼 둥글게 보였다.

깨어나고서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은 “아! 힘들다. 내 친구들은 지금 쯤 소주 한 잔 마시면서 여자 친구도 만나고 당구도 치고 신나게 놀고 있을 텐데. 난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나?”였다. 누워있는 내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태어나서 눈물이 그렇게 뜨거운 것인줄 처음 알았다. 연습을 하려고 일어나자 연출자의 불호령이 내렸다.

“당장 꺼져 임마! 배우가 공연 며칠 남겨놓고 몸 관리 하나 제대로 못해서 쓰러져? 너는 배우 자격도 없는 놈이야!” 연습을 하겠다고 우겼지만,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다. 오랜만에 햇빛을 보는 것 같았다. 대낮에 세종문화회관 분수대의 가로등을 붙들고 한없이 울었다. 큰 소리로 “남경읍, 병신 같은 놈”을 되풀이 하면서 흐느끼자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지나갔다.

다음 날 전체 연습이 끝나고 개인 연습을 하려고 하는데, 여주인공을 맡은 두 친구가 말했다. “읍이, 오늘은 개인 연습하지 말고 우리랑 몸보신하러 가자. 너 보신탕 먹을 줄 아냐? 넌 지금 연습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몸을 추스려야 돼.”

“나 보신탕 한 번도 안 먹어봤어. 괜찮아, 어쨌든 고맙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나를 끌고 보신탕 집으로 갔다. 그 때 남자 주인공 배역은 나 혼자였고, 여자 주인공 배역은 더블 캐스팅이었는데, 그들은 이경자와 성시호였다.

“아주머니, 여기 제일 좋은 걸로 주세요.”
내가 먹지 못하고 주저하자, 두 친구가 재촉했다.
“여자도 먹는데, 남자가 쩨쩨하게 이것도 못 먹냐?”하며 맛있는 듯 열심히 먹는 것이었다.

다음 날부터 그 친구들은 계속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읍이, 너 예전에 가무단 시험 볼 때 생각해봐. 넌 가무단에 최연소로 들어왔고, 수석으로 들어왔어. 그 때 너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다 어디로 간 거냐?”
“연출자 저한테 연기 해보라 그러지, 읍이 너의 반도 못 따라 온다.”
“넌 지금 너무 잘 하고 있어.”
나는 그 친구들 덕에 서서히 예전에 자신감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공연 며칠 전에는 옛날의 내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드디어 공연 첫 날이 되었다. 막이 오르고 1막의 마지막 장면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관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열광적인 반응에 모든 출연진과 스탭들이 놀랐다. 박수가 끝나지 않았다.

어떤 한 관객이 앵콜을 선창하자, 모든 관객들이 앵콜을 연호했다. 해설자역인 ‘엘갈로’가 다음 장면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지만 연호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무대감독이 그 전 장면의 조명큐를 불러서 그 장면을 다시 하고서야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후일담으로 들은 얘기지만, 같은 장면을 연거푸 공연한 것은 대한민국 공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 장면은 나 혼자 하는 역할이 아니고, 전 출연진이 나오는 그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Rape Ballet’라는 장면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막이 내렸다. 그 날 출연하지 않은 여주인공이 무대로 와서 나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읍이. 성공했어. 정말 잘 했다.”
그녀도 눈물을 흘렸고, 나도 눈물을 흘렸고, 함께 출연했던 여주인공도 나를 꼭 껴안으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기쁨으로 범벅된 ‘눈물의 꽃다발’을 받았다.

며칠간의 공연이 끝나고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 연출 선배님은 다른 사람에게 존경도 받고 학식도 있으며,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왜 나에게만 그렇게 무섭고 독하게 대했을까?’ 몇 달 후에 그 분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물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남경읍이란 어린 새내기 후배가 입단을 했는데, 하는 행동거지를 보니까 싹수가 있어. 선배로서 잘 이끌어 줘야겠는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

“온실의 화초처럼 키워야 할까? 아니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향이 강하고 생명력이 긴 들꽃처럼 키워야 할까?”

그 선배님은 후자를 택했고, 마음속으로 수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하면서 많은 고통이 있었고,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수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지만, 그 때의 혹독한 훈련 때문에 나는 들꽃처럼 혹은 들풀처럼 쓰러지지 않고 견뎌낼 수 있는 내성이 생겼다. 그때부터 나는 그 선배를 닮고 싶고 가장 존경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나와 외모도 비슷한 배규빈 형님이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어 차례 형님을 만나 뵌다.

글_남경읍 저, ‘쟁이’(제2부 ‘뮤지컬! 뮤지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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