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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고 싶다” 국립발레단 박일 발레마스터국립발레단 창단 50주년 기념작 ‘아름다운 조우’ 안무자로 참여해

저녁 6시, 국립발레단의 연습실 주변. 창단 50주년 기념작 ‘아름다운 조우’의 안무 연습을 끝낸 박일이 인터뷰를 위해 기분 좋은 미소로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두 손에는 작품 설명에 필요한 자료를 가득 들고, 얼굴에는 여전히 안무에 대한 고민을 덜어내지 못한 채였다.

박일은 1997년 단원으로 시작해 발레마스터로 활약하고 있는 지금까지 약 15년이라는 시간을 국립발레단과 동고동락해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무색해진 요즘으로 따지면 그가 국립발레단과 함께한 시간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렇게 묵묵히 국립발레단의 역사를 지켜오던 그에게 얼마 전 안무를 맡아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국악계의 거장 황병기와 함께하는 국립발레단 창단 50주년 기념작 ‘아름다운 조우’의 한 파트를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창단 50주년을 기념해 새롭게 선보이는 공연이라 “부담도 컸지만 영광스러움이 더 컸기에” 박일은 이 작품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연을 앞두고 안무 작업에 여념에 없는 박일을 만나 그의 이번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세 명의 안무자 중 유일한 국립발레단 스태프
“‘아름다운 조우’ 안무 도전, 부담 되지만 후회 하지 않는다”

국립발레단의 창단 50주년 기념작 ‘아름다운 조우’는 국악계의 거장 황병기와 국립발레단이 손잡은 프로젝트다. ‘가장 한국적인 감성을 담은 가야금 선율과 가장 서양적인 춤인 발레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번 공연은 황병기가 작곡한 기존의 음악에 ‘정혜진’, ‘니콜라 폴’, ‘박일’ 세 명의 안무가가 자신만의 ‘춤’을 입힌다.

먼저 ‘아름다운 조우’에 참여하게 된 소감을 묻자 박일은 “정말 영광이에요. 제가 언제 황병기 선생님과 작업을 해보겠어요. 국립발레단에서 이렇게 작업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좋아요”라고 쑥스러운 듯 말문을 열었다.

평소 “국립무용단 선배의 공연이나 KBS 국악한마당이 아니면 볼일이 많지는 않다”고 웃음과 함께 솔직하게 털어놓은 박일은 “처음 시작할 때 음악적인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이 음악에 맞춰서 내가 원하는 동작을 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한국 전통 음악은 호흡이 느리잖아요. 발레는 정형화된 부분이 많아서 맞추기가 어려웠어요. 음악을 계속 듣다보니까 이제는 그 안의 매력이 보여요. 이번 공연을 기회로 가야금 팬이 될 것 같아요.(웃음)”고 말했다.

‘아름다운 조우’의 중심에는 거장 황병기의 음악이 있다. 첫 미팅 때 마주한 대가 황병기에 대한 박일의 첫인상은 어땠을까.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어요.(웃음) 워낙 대가시니까 제가 위축됐었죠. 그러다 포스터 촬영도 하고, 미팅도 하고, 전화를 자주 드리면서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을 알게 됐어요. 유머러스하시더라고요. 선생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더 어렵게 느꼈던 것 같아요. 애교를 더 부렸어야 하는데.(웃음)”

이번 공연에 참여하는 세 명의 안무자 중 박일은 유일한 국립발레단 스태프다. 니콜라 폴은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추천을 통해 참여하게 됐고, 정혜진 예술감독은 한국무용을 전공자지만 평소 발레에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인연이 닿았다. 그에게 국립발레단 단원을 대표하는 입장으로서 부담은 없는지 묻자 “물론 부담되죠.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부담보다 제가 도전하려는 의자가 더 강했고, 제가 땀 흘려 노력하는 것이 더 보람이라고 생각해요”라는 솔직한 대답이 먼저 돌아온다.

“조그만 작품도 아니고, 국립발레단의 정규 프로그램에 제 작품이 들어간 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자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제가 오랫동안 이 길을 걸어왔고, 또 언젠가 안무가의 과정을 헤쳐가야 하잖아요. 부담감만 안고 있을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야금 음악에 도전하는 거고요. 이 도전을 통해 제가 얻는 것이 많아요. 안무와 주제에 대해 공부하면서 여태 보지 못했던 것과 여태 앞만 보고 달려왔던 자신을 돌아보게 됐고, 작은 생각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어요. 이러한 생각들이 안무로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미친 나비 날아가다’, 휴먼 도크(Human Doch)를 담다

박일은 이번 공연에서 ‘미친 나비 날아가다’라는 제목의 공연을 선보인다. 방랑 시인으로 알려진 김삿갓의 애환을 담은 작품이다. 그가 어렵게 결정한 작품의 제목 ‘미친 나비 날아가다’는 김삿갓의 ‘광접홀비’라는 ‘시’를 한글 제목으로 풀이한 것이다. 박일은 이 작품에서 방랑 시인의 삶을 단순히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삶 이면에 존재한 죄책감, 슬픔, 즐거움, 그리움 등의 정서를 다룬다.

“김삿갓이 홀로 방황하면서 느꼈을 가족에 대한 그리움,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등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가 쓰고 다니던 삿갓은 남들의 시선, 빛을 가리기 위한 것이잖아요. 생각할수록 그 ‘삿갓’이 주는 매력이 크더라고요. ‘삿갓’의 의미에 대해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갓’ 자체가 이 사람의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김삿갓은 그가 작품을 의뢰받기 전부터 구상해온 아이템이다. 평소 ‘찰리 채플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해를 품은 달’, ‘닥터 진’과 같이 시간을 초월하는 내용의 드라마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김삿갓’을 떠올리게 됐다. 그는 “제가 ‘찰리 채플린’을 좋아해요. ‘조선의 채플린’은 누굴까 생각해 보니 그게 ‘김삿갓’이더라고요. 제가 ‘김삿갓’에 대해 나름대로 작품을 구상하고 있던 중에 의뢰를 받았어요. 코미디가 아주 강한 작품을 하고 싶었는데, 음악을 들어보고 포기할 부분은 빨리 포기하면서 음악이 가진 장점을 살리려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의 핵심은 ‘휴먼 도크(Human dock)’에 있다. ‘휴먼 도크’는 ‘오랜 항해를 끝내고 돌아온 선박도 부두에서 점검을 하는 것처럼 인간도 일정 기간마다 점검이 필요하다’는 비유에서 시작된 말이다. “작품을 처음 생각했을 때 떠오른 게 ‘휴먼 도크’였어요. 작품 제목이 ‘미친 나비 날아가다’인데, ‘날아가다’는 의미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도 있거든요. 김삿갓의 억눌렸던 감정을 이 작품으로 정화시켜 주는 거죠. 산천을 떠돌면서 남에게 웃음을 주던 김삿갓이지만 그의 내면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짐이 있었을 것 같아요. 김삿갓이 과거 시험에서 비판했던 대상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방랑을 시작하잖아요. 그때부터 그의 방랑생활, 그의 ‘휴먼도크’가 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담아보려고 했어요”

‘김삿갓’이라는 소재와 ‘휴먼 도크’라는 그의 이야기 주제는 얼핏 무거워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무겁기만 할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박일은 김삿갓이 방랑의 시간 동안 풀어놓은 수많은 해학을 ‘놀이’라는 시선으로 풀어낸다. 박일은 “제가 봤을 때 김삿갓의 해학은 놀이 문화예요. 어려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시를 하나 적어서 양반들에게 툭 던져주고, 기생집에서도 시 한 수 던져주고 술 한 잔 얻어먹고요. 그 자체가 바로 김삿갓의 ‘놀이’라는 거죠. ‘놀이’는 재미있어야 하고, 비판을 당하는 대상에겐 따끔하게 느껴져야 해요. 그래서 너무 무겁지 않도록 재미를 주려고 했어요. 섹시하면서도 코믹한 면을 넣어보려고 해요(웃음)”라고 전했다.

오랫동안 정형화된 춤을 춰온 발레 무용수들에게 박일이 요구하는 ‘섹시하지만 코믹한’ 동작은 표현하기 굉장히 어려운 난간이었다. 여기에 섹시한 동작을 부담스럽지 않고 재치 있게 표현하는 것은 안무자와 무용수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박일은 “무용수들의 골반을 이용하는 춤이 있어요. 무용수들이 말을 할 수 없으니까 조금 더 과장된 표현을 통해 섹시한 느낌을 전하죠. 신체를 통해 유머와 재치를 표현하고 싶은데 정말 힘들더라고요. 개그맨 분들이 새삼 존경스러웠어요”라고 말했다.

“계속 고민만 하고 있다”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박일을 보고 있노라면 새삼 그가 이 작품에 얼마나 큰 고민과 애정을 쏟고 있는지 느껴진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부족한 부분을 털어놓다가도, 작품에 몰입하고 있는 자신의 열정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연습하는 동안 에피소드는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에피소드…. 제가 지금 생각이 너무 많아요”라는 대답이, 다른 안무자들의 춤을 봤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지금 다른 선생님 안무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웃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그만큼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다.

무대, 소품, 안무 등 작품의 구석구석에도 그의 눈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박일 이번 공연의 무대와 소품에 대해 “스태프 회의를 통해서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어요. 20분 정도의 작은 스테이지라고 해서 소품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거든요. 지금은 ‘삿갓’을 표현하는데 모든 신경이 가 있어요. 그리고 너무 리얼한 소품이 들어가면 신파가 돼 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통의 맛을 살린 현대적인 느낌’으로 갈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안무 외에 다양한 분야를 신경 써야 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없냐고 묻자 “너무 힘들어요.(웃음)”라는 장난기 섞인 투정이 터져나온다. “스태프들과 회의를 참 많이 했어요. 모든 아이디어를 오픈해 놓고 이건 ‘내 작품이 아니라 당신들의 작품이다’고 말했죠. 그러고는 모든 아이디어를 뽑아서 썼어요. 제가 부족하니까.(웃음) 정말 다들 열심히 해서 고마워요”

“원래 금메달 딸 실력을 가졌어도 최선을 다해 땄을 때 그 성취감이 다른 법이다”

‘아름다운 조우’에는 박일의 작품에서만 보이는 몇 가지 특이사항이 있다. 세 개의 안무작 중 그의 작품에서만 유일하게 가사가 있는 노래(차양이제/작사_박경선/노래_윤인숙)가 등장한다. 3장에서 등장하는 이 노래는 ‘연인과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에서 배경으로 흐를 예정이다. ‘정성스럽게 차를 다리는 모습과 사랑을 소중하게 나누는 연인의 모습과 닮았다’는 그의 부연 설명이다.

작품을 열어주는 ‘연날리기’라는 오프닝 곡은 그의 작품 끝자락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아름다운 조우’ 속 다른 안무작과는 사뭇 다른 작품 구성이다. 이는 드라마 ‘추격자’에서 ‘1화의 첫 장면이 마지막 장면과 이어지는 구성’을 유심히 본 그가 자신의 작품에 도입해 본 것이다.

이번 공연에 다양한 시도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그에게 때로는 ‘좀 쉽게 가라’는 주변의 조언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는 “20분 정도의 작품을 그렇게 고민하면서 하는 사람도 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입을 열었다.

“작품은 10분이건 1시간이건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그럭저럭 연출해도 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지만 제가 최선을 다했을 때 진정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주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금메달을 따는 선수가 있잖아요. 그것보다는 금메달을 딸 실력을 갖고 있어도 더 열심히 노력해서 더 업그레이드 된 기록과 모습으로 금메달을 땄을 때 자신이 느끼는 희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운 조우’에서 제 작품은 20분 정도지만, 저는 1시간 정도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때로는 이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매일매일 생각이 달라지고 있는데 여기서 좋은 것만을 뽑아 보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웃음)”

마지막으로 박일에게 조금 특별한 의미로 남을지도 모르는 이번 공연에 대한 각오를 물었다. “늘 핸드폰에 저장해 놓는 문구들이 있어요. 제가 댄서다 보니 가장 좋아하는 말이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문구예요. 이 글에 담긴 의미는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제가 춤을 추고 있을 땐 거기 빠져서 미쳐버려야 해요. 저는 지금 안무를 하지만 동시에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제게는 아무것도 들어오면 안돼요. 사실 아무도 없을 때 자기 혼자서는 별 행동 다하잖아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요. 그렇게 춤을 춰야 하고, 그렇게 안무하고 싶어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요”

정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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