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천막 뒤에서 유령처럼 등장한 아이들이 얼굴 없는 그림자로 흔들흔들 춤을 춘다. 제 입으로 불행을 노래하며 차례로 쓰러지는 아이들, 그들에게 구원은 존재할까. 네 명의 아이들은 그들을 “세상을 구원할 천사”라 불러준 유모 ‘메리’에 의해 ‘구원의 병기’로 변해간다. 그들에게 기억은 곧 흉기다. 어느 날 자신이 실험대의 생체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흉기의 칼날은 사정없이 아이들의 행복을 찢는다.

관객은 ‘정치적 실험도구’에 불과했던 존재가 평범하게 행복하고 싶은 ‘한 명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치열하게 목격한다. 아이들은 닿을 듯 닿지 않는 진실 사이로 추락하면서도 연약한 손가락을 맞잡으며 과거를 좇는다. 실험대가 회전을 시작하면, 코끝까지 흉기의 칼날이 덮쳐오는 객석에서는 무력한 슬픔과 분노가 저릿하게 밀려온다. 

‘나치즘’과 ‘생체실험’, ‘프로이드’의 3가지 키워드

미궁 같은 작품을 빠져나갈 탈출구에는 3개의 명패가 붙어있다. ‘나치즘’, ‘생체실험’, ‘프로이드’ 등의 키워드다. 자극적인 키워드들은 중반 이후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며 관객의 촉수를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특히, 미해결 살인사건과 사라진 유모 ‘메리’, 의문의 수첩과 ‘기억나지 않는 수요일’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네 아이의 ‘진실 찾기’ 행방은 더욱 의문을 더한다. 거대한 무엇이 도사리고 있다는 암시는 환했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극단적인 타임슬립 속에서 점차 그 형태를 갖춰 나간다.

무대는 심플하지만 곳곳에 의미심장한 상징들이 숨어있다. 사각의 비스듬한 중앙 무대는 과거로 향하는 오르골이자 잔혹한 실험대다. 중앙 무대 바깥의 네 개의 의자는 아이들의 보금자리이자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이다. 실험대 위에서 아이들의 고통은 반복되고 가혹한 운명이 쳇바퀴를 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연출도 인상적이다.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과거로의 빠른 변환이 인물들의 고통을 더욱 리얼하게 드로잉한다. 의자 위에서 갑자기 툭 떨어지는 네 개의 얼굴들, 배우의 표정과 조명의 변화 역시 간간이 섬뜩하게 객석의 온도를 낮춘다.

독특한 안무 + 대사적인 넘버

이 작품에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독특한 안무다. 서윤미 연출은 작품의 안무를 ‘신체언어 움직임’에 가깝다고 말했다. 심리추리스릴러라는 장르를 살리기 위해 일반적인 뮤지컬 안무가 아닌 현대무용처럼 움직임을 구현했다. ‘안나’와 ‘헤르만’의 닿을 듯 닿지 않는 엇갈림을 표현한 안무나, 서로가 감시자로 얽혀 있었던 과거를 연쇄적으로 얽히는 사슬처럼 표현한 안무는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기묘한 무늬의 잔상을 남긴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위로 흐르는 16개의 넘버는 다분히 대사적이다. 사건 정황이나 인물의 감정을 담은 디테일한 가사에 어둡고 클래식한 멜로디를 얹었다. 연극적 요소가 강한 뮤지컬이니만큼 음악이 스토리 이상의 자극을 남기지 않는 점은 아쉽다. 하지만 전환이 빠르고 높낮이 변환이 큰 드라마를 전달하기에는 효과적인 판단이었다. 특히, 사일렌트 웬즈데이(Silent Wednesday)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수요일의 진실’에 접근하는 가사와 멜로디의 드라마적 구성이 극 전체 분위기를 잘 담아냈다.

‘생경한 아픔’은 곧, ‘리얼한 생존 감각’

아픔은 때론 살아 있다는 증거다. 생경한 아픔은 삶에 어떤 위기가 왔음을 인식하는 순간이며, 생존을 위한 절실한 감각이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행복한 생존을 위해 고통의 터널로 스스로 돌진하는 작품이다. 생명줄에 엉겨붙은 총탄을 빼내기 위해 총탄이 지나간 상처길을 헤집는 작업은 고통스럽지만 정직하다. 관객은 참혹한 과거에 등 돌리지 않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네 아이들에게서 감격스런 치유를 경험한다.

주목할 부분 역시 작품의 결말이다. 통각의 절정에서 기억을 스스로 잘라내야 했던 뼈저린 그들에게 되찾은 과거란 접붙인 살점처럼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과거 불행했던 기억을 지워내지 않고 과감히 ‘동행’하는 길을 선택했다. 불행한 과거를 접붙인 그들이 과연 행복의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관객의 앞에서 ‘동의합니다’를 외치는 네 배우의 담담한 목소리가 객석에 결코 가볍지 않은 울림을 전한다.

박세은 기자_사진 이지혜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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