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리 연출은 2011년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두고 여성들만의 단순한 성토대회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브 엔슬러 여사가 사회운동의 목적으로 만든 이 작품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 뿐 아니라 남성, 나아가 사회 전반의 인식에 영향력을 주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유리 연출은 이번 작품의 첫 부분, 자신의 메시지를 담은 독백에서 “여성의 성기를 모두 다른 형태와 향기를 가진 ‘꽃’과 무한한 미지의 영역인 ‘우주’에 비유했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영향력, 작품의 전체 역사에서 2011년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도달해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커플이 같이 본다는 게 의아했는데 이제 이해가 되네요. 꼭 남자친구를 데려가야겠어요. 남성 관객에게 이번 작품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관객이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남성들이 꼭 봐야 하는 작품이라고들 해요. 게스트들도 이번 작품 출연으로 여성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게 됐다고 많이 말씀하세요. 이 작품은 여성들이 성토대회를 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절대 아니에요. 관객이 이 연극을 보고 난 뒤 파트너에 대해서 성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서로 더 창의적으로 가꾸고 소통하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파트너라고 하셨는데 부부간 문제도 함께 포함하는 말씀이신지.

“사실 지금 부부이혼율이 굉장히 높잖아요. 그것이 뿌리 깊은 한국의 성문화나 가족문화의 병폐라고 보는데요. 남성은 군림하고 가부장적이고, 여성은 반대로 너무 폐쇄적이고 수동적이죠. 여성 스스로가 성에 대해 터부시하고 있어요. 한국 사회는 근본적으로 성에 대해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문화에요. 가정문화가 깨지면 극단적으로는 이혼으로 가고 이는 곧 사회문제가 될 수 있죠. 그래서 저는 가족구성원에서부터의 변화가 바람직한 사회가 되는데 가장 일차적인 일이라고 보고, 부부간에는 성인식이 변화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첫 대사가 이래요.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보지탐구에 들어가겠습니다! 부부간에는 성도 탐구대상이라고 봅니다”

-연출님 말씀을 듣다 보면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단지 여성의 성(sex) 문제뿐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성(gender)을 같이 담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 작품 속 ‘여성성의 극복’의 범주를 그렇게 확대해석해도 괜찮은지요.

“물론입니다. 이브 엔슬러 여사가 작품을 구성했을 때부터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어요. 여성의 성에 대한 비하가 곧 여성성 전체에 대한 비하인 거죠. 작품이 주로 여성성의 가장 원초적인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여성문제까지 담는다고 봅니다. 공연을 본 관객은 자연스레 그 부분에 대한 인식도 할 테니까요.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메시지도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게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극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것은 문제의식에 비해 다소 소극적이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 같은데요. 여성의 문제를 직접적인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시키려는 생각도 있으신지요.

“저는 이 작품의 중추적인 역할은 이지나 프로듀서라고 봐요. 그가 10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국내에 도입했고, 10년 전에 한국 사회에서 관객을 향해 이런 메시지를 외친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처음에 이지나 프로듀서에게 의뢰를 받았을 때 저도 이 작품을 단순한 연극으로 접근하지 않았어요. 이 작품을 연출할 때 제 자신도 한 명의 여성으로서 발언의 역할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죠. 전 세계적으로 ‘버자이너 모놀로그’에서 출발한 ‘V-day운동’이 있어요. 하지만 그동안 한국에서는 전혀 이런 사회적 운동의 개념 없이 연극에만 머물러 있었죠. 이 작품 자체가 애초에 사회운동을 위한 목적극이기 때문에 처음 연출하기로 마음먹으면서 10주년인 올해 이 작품이 사회운동 차원으로 발전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출발점이 된 이지나 프로듀서나 김여진 씨와 같은 배우도 있고 의기투합이 된다면 어떤 발전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요. 왜냐하면 공연을 하면 연습하는 단계에서도 그렇고 배우나 연출가, 프로듀서 모두 의식적인 변환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조두순 사건, 광주인화학원 사건, 고대의대생 사건 등에 대해서 토크쇼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발언하기도 하죠. 이 연극이 그런 차원으로까지 역할을 하기 기대한다는 것이 제 감춰진 의도에요”

-작품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의도나 메시지를 담으셨나요

“작품 첫 부분의 모놀로그는 원작에 없는 거예요. 올해 공연을 하면서 짧은 모놀로그를 제가 직접 쓴 것이죠. 연출로서의 제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일 수도 있어요. 여성의 성기가 각자의 얼굴이 다르듯이 다 다르다고 산부인과 의사들이 말하는데요. 그것을 ‘꽃’으로 비유했어요. ‘아름다운 우주가 거기에 있다’라고 하면서 여성들이 자신의 성기를 그렇게 ‘꽃’처럼 ‘우주’처럼 느꼈으면 했어요. ‘보지’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재구성했습니다. 거기에 아주 특별한 성과 관련한 사건이나 기억을 가진 여성들의 모놀로그가 극으로 삽입되고 어느 부분은 방송예능프로처럼 구성한 부분도 있어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도 올해 개정판에 있는 내용을 새로 집어넣은 거예요. 그 대목은 일반 시낭송과 다르게 아주 담담하고 담백하게 표현해야했죠. 배우들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작품이에요. 우리 배우들은 아주 고통스러운 작업을 거쳐 현재에 왔어요. 다들 잠재력이 대단한 배우들이고 그 멤버였기에 소화해낼 수 있었어요. 이번 공연은 정말 멤버구성이 좋았어요”

-공연 중에 특별게스트가 깜짝 등장하는데요. 게스트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되나요.

“게스트가 들어왔다 나가더라도 극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했어요. 자연스럽게 삽입돼 있죠. 관객도 게스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고요. 게스트는 강간피해여성의 편지를 같이 읽으면서 여성 폭력의 현실적인 사건들과 게스트의 여성폭력에 대한 인식 등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요. 좀 더 객관적이고 열린 형태로 의견을 수렴하는 역할을 해요. 관객반응도 좋습니다. 얼마 전 특별게스트로 등장한 송용진 씨는 기타를 들고 나와서 즉석에서 보지송을 만들어 불렀어요. 후렴이 ‘생각해보지, 아껴줘보지, 사랑해보지’하는 식으로 가사가 참 예뻤어요. 관객과 함께 불렀는데 이처럼 일반적인 공연문화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이번 공연에서 비일비재해요. 배우들은 이런 콘셉트의 공연을 해본 적이 없어서 굉장히 힘들어해요. 관객은 미디어를 통해 많이 접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요. 배우들이 농담으로 ‘우리 연극하는 거 아니야. 이거 버라이어티 쇼야’ 하더라고요. 그리고 또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배우가 자신을 깨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어서 굉장히 좋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막을 올리고 일주일 만에 한 이야기에요.(웃음)”

-여성으로서 다루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나요? 이유리 연출님의 향후 작품도 궁금해집니다.

“지난해에 우연히 ‘프루프’를 하게 됐고, 올해도 역시 우연히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하게 됐어요. 저와 이지나 프로듀서는 동갑 친구인데요. 어느 날 그러더라고요. 연출로 활동해온 이지나 씨가 프로듀서를 하고 싶다고. 나는 연출하고 싶은데 그럼 바꿔서 해볼까 하는 얘기를 농담처럼 했어요. 그때 이지나 프로듀서가 아주 섬세한 탐미적인 작품을 내가 연출하면 좋겠다고 하면서 다음에 의뢰해야지 그랬거든요. 그러다가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프로듀서  데뷔하는데 내가 연출해보는 게 어떻겠냐 하게 된 거예요. 저는 좋다고 했죠. 이러다가 여성연극 전문 연출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그것도 괜찮겠죠. 제 강점이기도 하고요. 제가 원하는 것이 내면적인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작품을 하는 거예요. 사람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표현하는 게 재미있어요. 여성의 문제는 나이 들수록 사회 속에서 여성의 역할이나 여성의 불이익,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많이 느끼게 돼요. 제 자신이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로서 우리 사회가 그렇다는 거죠. 여성의 문제는 아직도 꺼내놓지도 않은 문제도 많고 해결해야 될 문제도 많아요. 앞으로도 여성의 문제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작품은 흥미가 있고 계속 도전해보고 싶어요. 남자 스타가 나오는 작품이 잘되는 시대에서 여성이 나와서 여성을 다루는 작품이 흥행하기는 쉽지는 않겠지만요.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는 않아요. 여성의 문제를 여성의 눈으로 보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아직까지도 국내에서 원제를 한글번역대로 ‘보지의 독백’으로 부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전체 ‘버자이너 모놀로그’ 역사의 최종목표를 생각했을 때 어느 지점쯤에 와 있을까요.

“뭐든지 탄생하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쇠퇴하고 죽는 단계를 거칩니다. 현재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성장단계에요. 제가 거의 번안각색을 했는데요. 전작을 보신 분들은 다른 작품을 보는 것 같다고 하시죠. 올해는 목표가 관객들이 보다 더 여성의 성을 친밀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거였어요. 작품의 마니아가 아닌 분들도, 사회운동적으로 의식적인 접근이 아닌 분들도 관람하면서 친밀하게 작품을 자신의 문제와 이웃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초점이었죠. 훨씬 대중적으로 콘셉트를 잡았습니다. 올해는 관객의 인식 수준과 만나는 접점이었고 동시에 그 수위가 조금씩 성장하는 단계라고 생각해요”

-사람 나이로 치자면 청소년 시기? 이삼십 대쯤 될까요?

“딱 스무 살 정도?”

-정말 한창때네요

“이 연극의 성숙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의 성숙도의 문제죠”

-10주년을 맞은 국내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지금 딱 스무 살’이라는 말이 와 닿습니다

“막 성년이 된 시점이죠 (웃음)”

-위험천만하면서도 성장할 준비는 마친 거네요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회의 성숙도가 그렇지 않을 뿐이죠”

(인터뷰-③에서 계속)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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