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공연된 유니버설 발레단의 ‘디스 이즈 모던2’를 위해 네덜란드 댄스 씨어터의 마스터 ‘얼치 아란부루(Urtzi Aranburu)’가 한국을 찾았다. 그는 스페인 출신의 무용가로 네덜란드 댄스 씨어터의 주니어 단계라 할 수 있는 세컨 그룹을 거쳐 퍼스트 그룹의 주요 멤버로 90년대 이리 킬리안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활약해오다 현재는 지도위원이 되어 있다. 필자는 1992년 호암아트홀 무대에 선 그의 20살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고무 같은 발등과 유연한 다리는 분명 클래식 발레리노의 그것 인데, 구르고 꺾어지는 현대춤 동작을 너무나 능숙하게 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한국 나이로 서른여덟이 된 그는 4년 전 무용수 생활을 은퇴하고 네덜란드 댄스 씨어터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무용단에 작품을 지도하는 마스터로 활동하고 있다.

본격적인 작품연습이 있기 전 한가로운 오전시간을 보내고 있는 ‘얼치 아란부루’를 만나보았다. 에스파냐 억양이 섞인 영어로 천천히 말하는 ‘아란부루’는 영화배우 숀 팬을 닮은 외모와는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이번 무대에 그의 지도를 받은 유니버설 발레단 단원들의 반응도 하나 같이 “So Nice!"였다. 킬리안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세계적인 무용수였고, ‘이리 킬리안’을 대신할 정도로 지도력을 인정받는 그이지만, 낯선 무용수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겸손한 마스터였다.

(다음은 월간<춤과 사람들> 2011년 7월호에 게재된 글의 일부이다.)

- 1992년 NDT2 한국공연에 출연하신 것을 기억 합니다. 20여 년 전이네요.

저를 기억하신다니 놀랍습니다. 당시 아시아 지역을 처음 방문한 곳이 한국이어서 저에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퍼스트 그룹으로 옮긴 후 두 번 정도 한국 공연을 더 왔었으니 이번이 네 번째 방문이 되는 군요. 지난 3번은 무용수역할이었는데 이번은 지도자로 오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 어떤 마음으로 한국에 오셨나요?

어느 때보다 큰 책임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무용수로 활동할 때는 감독, 안무자가 모든 것을 알려주고 그대로 하면 되기 때문에 (춤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부담이 덜했는데, 이제 지도자가 되었으니 저에게 의지할 무용수들을 위해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처음엔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무용수 때만큼 즐거운 일이 되었습니다.

- 한국인 무용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었나요?

21세미만으로 구성된 NDT2에 한국인 여성 무용수가 한 명 있습니다. 한국계 혼혈인 남성무용수도 한명 있어요. 그 외에는 유럽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들을 몇 명 봤지만 그리 잘 알지 못합니다. 이번기회에 유니버설 발레단원들을 만나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두 적극적이고 즐겁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 유니버설 발레단이 킬리안의 안무를 소화하는데 충분한 기량을 가졌다고 보나요?

그렇습니다. 유니버설 발레단이 클래식 작품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을 압니다. 이번에 공연될 두 작품 모두 클래식 발레 테크닉에 가까운 작품이기 때문에 유니버설 발레단과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킬리안’의 작품을 잘하려면 반드시 클래식 발레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 다른 무용단에게 NDT의 작품을 전하는 데에 기준이 있나요?

보통의 경우 NDT의 레퍼토리 중 공연할 단체가 원하는 작품을 선택하게 되는데,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오래된 작품이 주로 선정됩니다. 근래의 작품보다 지도하기에 좀 더 수월한 면이 있어요. 하지만 무용수들의 기량이 높아야 가능한 작품들입니다. ‘킬리안’은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도록 쉽게 허락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무용단의 여러 면을 검토한 후 결정 합니다.

- 이번에 선정된 두 작품은 어떤 것들인가요?

‘이리 킬리안’ 안무의 ‘PETITE MORT:어떤 죽음’과, ‘SECHS TANZE:여섯 가지의 춤’입니다. ‘프티 모르’는 1991년 모차르트 서거 200주년을 기념해 안무된 것으로 고요하지만 강하게 발산되는 에너지와 섹슈얼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2002년 NDT 내한 때 공연된 적이 있어요. 모차르트의 음악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대중적인 피아노 협주곡의 느린 두 부분이 쓰였습니다. 무용수에게는 테크닉 면에서 어려운 작품이지만 관객에게는 아름다운 춤으로 기억될 겁니다. 유니버설발레단 단원들이 배워보고 싶은 작품 1순위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무용수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작품입니다.

- ‘세츠 탄츠’는 어떤 작품이죠?

1986년 NDT에서 발표된 작품으로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것입니다.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12명의 남녀가 박진감 넘치고 스피디한 춤을 선보이는 것으로 가볍고 밝은 작품입니다. 춤을 모르는 관객에게도 호평을 받는 작품이죠. ‘세츠 탄츠’는 독일어로 ‘여섯 개의 춤’을 의미하는데, 모차르트가 작곡한 6개의 독일무곡(Sechs Deutsche Tanze, KV 571)을 사용하여 모차르트가 이 곡을 작곡할 당시의 수많은 전쟁과 혁명 그리고 사회의 대변동 등 어려웠던 역사적 순간을 나타내고자 한 작품입니다. 모차르트가 당시 주변 환경의 어려움을 상대적으로 넌센스한 음악으로 표현을 했듯이 이리 킬리안 역시 특별한 이유 없는 6개의 극을 통해 우리 대부분의 마음속에 있는 어려운 세상의 모습을 담고 있어요. ‘킬리안 매니아’들도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 당신의 무용단 동료였던 ‘가나모리 조’를 만났습니다. 그처럼 안무가가 될 생각은 없나요?

없습니다. 아무리 무용을 오래 한다고 해도 안무능력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동으로 생긴다고 믿지만, 안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닙니다. 새로운 안무 작업에 있어서 함께하는 무용수에게 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경우는 있지만 안무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다.

- 함께 작업한 안무가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인물이 있나요?

‘이리 킬리안’을 좋아합니다. 그는 한 번도 고함치는 것을 본적이 없을 정도로 매우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람입니다. 무용수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점이 특별히 좋아요. 그는 무용수가 해야 할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있고, 그 계획을 작은 목소리로 지시해요. 그렇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거의 없습니다.

- ‘이리 킬리안’의 춤을 보면 매우 혹독할 것 같은데 의외의 성향을 가졌네요.
 
사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킬리안’의 작품이 힘들지는 않아요. 워낙 잘 훈련된 무용수들이고, 장기간 리허설을 하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작품을 소화합니다. ‘킬리안’은 무용수들이 가진 여러 감각을 잘 이끌어내는데, 저의 경우 작고 민첩하기 때문에 빠른 춤을 많이 추었죠. 힘들어 보이지만 무리한 적은 없어요. 어떤 이들은 우리가 특별한 훈련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전에 발레클래스를 하고 오후에 작품 리허설을 하는 것이 전부에요. 이미 많은 훈련을 받은 무용수들이 모여 있을 뿐이죠.

- 안무가 말고 인간 ‘이리 킬리안’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의 롤모델인가요?

매우 조용하고 지적인 사람입니다. 자신이 무용계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고 있지만 권위적이지 않고 편안한 사람이에요. 매사에 깊이 생각하고, 화가 나도 심각한 얼굴로 문제를 생각할 뿐 표출하지 않습니다. 독특한 유머가 있는데, 농담을 아주 좋아해요. 그런 그를 매우 좋아하지만 그를 닮고자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도 닮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나이고 싶고 그것에 만족합니다.

-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나요?

‘킬리안’의 작품가운데 좋아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하나를 꼽자면 ‘SARABANDS’입니다. 남성무용수만 출연하는 작품인데, 무용수의 입장에서도 매력적인 것이에요. 다른 안무가의 작품가운데에는 피하고 싶은 레퍼토리들이 가끔 있는데, ‘킬리안’의 작품은 모두 좋아합니다. 요즘 3년간 신작을 발표하지 않고 있는데, 그가 언제 신작을 낼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 NDT의 무용수도 실수를 하나요? 기억에 남는 실수를 말해주세요.

우리도 인간이기에 실수를 합니다. 주로 관객은 모르고 안무자와 무용수들만 아는 작은 실수가 대부분이죠. 20년 이상 무대에 섰으니 저도 실수의 경험이 많습니다. 스텝을 조금 틀리는 정도의 미미한 실수가 대부분이었지만 크게 넘어져서 관객을 당혹시킨 적도 있어요.

- 언제 어떻게 춤을 시작했죠?

9살 때 시작했어요. 제 어머니와 누나가 발레를 했었기 때문에 우연히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취미로 했지만 저는 춤이 직업이 되었어요. 스페인에서 태어나 무용학교를 다녔지만 스페인 무대에 활동한 적은 없습니다. 1991년 스페인에 순회공연을 왔던 NDT의 오디션에 참가하여 뽑히면서 NDT2에 입단했고, 2년 후인 1993년 NDT의 퍼스트 그룹으로 옮겨 16년 동안 용수로 활동했습니다. Jiri Kylian, Mats Ek, William Forsythe, Hans van Manen, Nacho Duato, Ohad Naharin 등의 작품에서 춤추었습니다. 2007년부터 발레마스터로 전향하여 현재까지 NDT 2와 다른 무용단들에게 NDT의 레퍼토리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 처음부터 모던발레를 꿈꾸었나요?

처음에 클래식 발레를 시작했지만 곧 컨템포러리 작품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클래식 작품의 왕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던 것이죠. 춤뿐 아니라 신체조건 등 극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킬리안’의 작품 같은데서 춤추고 싶었어요. 여러 개성이 수용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 스페인출신이라는 것이 표현에 영향을 미치나요?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추는 춤들 대부분이 스토리가 있거나 강한 캐릭터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 민족성이 드러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작업은 주로 안무에 따른 신체 움직임, 정확한 폼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출신이 드러나지 않아요. 그렇다고 기계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에 따라 눈으로 표현한다는 생각을 하며 춤춥니다.

- 세계적인 무용수로써 어떤 점이 힘들었나요?

아주 열심히 했는데 부상을 입거나, 10명을 뽑는데 11등을 해서 캐스팅이 안 될 때 힘들었어요. 주로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 고충이 많았죠.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한 보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힘들었어요. 하지만 전 세계에서 우수한 무용수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고 모두가 열심히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된 지금 가능한 한 무용수였을 때를 기억하려고 해요. 그들의 힘든 순간을 알기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 어떤 지도자가 되려합니까?

35살이 되면서 무용수를 그만두고 NDT2를 지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용수로 22년을 살았으니 무용수의 입장을 잘 이해합니다. 지도하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스튜디오 분위기입니다. 무용수들이 강압적이거나 불편한 상황에 있으면 좋은 춤이 나올 수 없어요. 춤을 즐겨야 합니다. 즐기는 가운데 안무자와 무용수 모두가 원하는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나요?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미래에 대한 계획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떤 목표도 생각하지 않고 왔어요. 발레가 좋아서 학교를 다녔고, 우연한 기회에 오디션을 봐서 NDT단원이 되었고, 지금은 발레마스터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단계별로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기회가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현재에 충실하고 싶어요.

-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이 힘들지 않나요?

저는 북부 스페인 출신으로 15살에 교육을 위해 마드리드로 혼자 갔고, 19살에 NDT에 합류하며 스페인을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1년에 두 번 가족을 만납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특별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어요. 요즘은 인터넷이 있어서 일주일에 두 번씩 가족과 화상 통화를 하기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3살 된 조카가 있는데 요즘은 그 아이에게 푹 빠져 있답니다.

- 춤 이외의 시간에는 무엇을 하나요? 다른 춤들도 즐기나요?

춤 이외의 시간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작품지도를 위해 예습도 많이 하고, 무용단을 위해 필요한 작품을 찾아서 보는 시간이 많지만, 스튜디오 밖에서 까지 저의 사적인 시간을 뺐기는 건 싫습니다. 특별히 챙겨봐야 할 공연을 제외하고는 저를 위한 휴식을 갖습니다.

- 춤이 당신 인생에서 무엇인지 묻는 다면 어리석은 질문일까요?

아니요. 전혀 어리석은 질문이 아닙니다. 잠시 생각해보게 만드는군요. 춤은 당연히 나의 전부입니다. 가족의 생일에 함께 있지 못하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일본 투어 중이어서 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을 출 수밖에 없는 것은 춤을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가보고 싶었던 세계 각국을 여행하는 등 제 삶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저는 춤에 미쳤다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스스로 시작한 이상 춤 때문에 잃는 것과 얻는 것들 모두를 안고 가는 것입니다. 제가 선택한 것이기에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글_김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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